[역사]조선전기의 문예부흥
- 최초 등록일
- 2006.11.29
- 최종 저작일
- 2006.11
- 9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서문
본문
1. 세종은 어떤 사람인가
2. 집현전의 기능
3. 세종대의 문화사업
-역사의 정체성 확립
-예악의 정리
-훈민정음의 창제
-과학기술의 개발
맺음말
본문내용
서문
조선왕조의 건국은 사회혁명을 가져왔고 이에 수반하여 문명개혁이 나타났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한 이래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조선의 기틀이 자리잡혀가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선사회는 이전의 고려시대에 비해 한층 성숙한 문화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여기서는 이러한 일련의 행위들을 문예부흥이라 칭하고 그중에서도 특히 세종대에 일어난 여러 가지 사실들을 고찰해 보도록 한다.
본문
1. 세종은 어떤 사람인가
세종의 휘(諱)는 도(祹)요, 자(字)는 원정(元正)으로 1497년(태조 6) 4월 ·10일(양력 5월 15일)에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에서 이방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방원(1367~1422)은 조선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신의왕후(神懿王后) 한(韓)씨의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유덕(遺德)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함흥에서 태어나 1383년(우왕 9)에 문과에 급제하여 1392년(공양왕 4) 3월 정적인 정몽주를 제거하고, 그해 7월에 이성계를 국왕으로 추대하는 등 역성혁명에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그리하여 그해 8월에는 정안군(靖安君)에 봉해졌으나 정도전 등의 배척으로 개국공신에 끼지도 못하고 세자자리도 이복 막내 동생인 방석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그러나 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둘째 형인 방과 를 2대 왕으로 추대하였다가 1401년에 제 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넷째 형 방간을 귀양보내고 정종의 선위를 받아 3대왕이 되었다. 정종은 제 2차 왕자의 난 때 그의 사병을 방과에게 보냈다는 비난을 받았고, 밖에 있던 자신의 아들을 불러들여 후계자를 삼으려 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다. 왕위를 물려주지 않을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나 한다. 방원은 두차례의 왕자의 난을 성공시켜 개국공신, 정사공신 1등에 추록되었다.
세종이 왕위 되기까지의 과정은 양령대군의 세자폐위과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태종이 세자를 교체하는 과정에대하여 일설에는 태종의 뜻이 충령대군에게 있는 것을 눈치채고 양령대군이 양보한 것이라고도 한다.
참고 자료
이성무 「세종대의 역사와 문화」,『세종시대의 문화』,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2001
한영우 『다시찾는 우리역사』, 경세원, 2001
변태섭 『한국사 통론』, 삼영사,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