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비안 웨스트 우드
- 최초 등록일
- 2006.11.19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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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990년과 1991년 2년 연속 `올해의 브리티시 디자이너`로 선정되었으며, 영국 패션에 대한 기여도를 인정받아 `OBE`를 수상하기도 했다. 가장 영국적인 울과 트위드, 타탄, 리넨을 사용함으로써 그녀는 브리티시 스타일의 전형이 되었으며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퀄리티를 확보할 수 있었다.
women`s wear daily출판사는 그녀를 세계 6대 디자이너로 선정했으며 ITV 텔레비젼은 그녀와 관련된 모든쇼를 방영했다. 1991년 마가렛 대처로 변장해 상류층의 잡지인 Tatler의 표지에 실림으로서 센세이션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2년에 Bordeaux에 있는 CAPC박물관은 그녀의 회고전을 준비했으며 1994년에는 Leiden에 있는 Stedelikj박물관에서 그녀의 작품 전시회가 있었다.
1992년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목차
성별
본명
양력
수상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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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비안 웨스트우드를 다룬 기사들
본문내용
웨스트우드의 삶
평범한 주부에서 펑크의 1인자로..
그녀는 대학을 나와 교사 생활을 하다 21살 때 댄스홀 매니저였던 데레크 웨스트우드와 결혼했다. 공업지대 더비셔에서 공장 근로자 딸 로 태어난 그녀는 17살 될 때까지 미술책이나 영화 구경 한번 한 적이 없다. 예술적 소양을 감지할 부분이라곤 어릴 때 멋 부리기를 좋아했다는 것과 교사 생활 중 틈틈이 보석 디자인을 해서 벼룩시장에 내다 파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다 결혼 3년 만에 예술학교 학생이던 말콤 맥라렌을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인생이 1백80도 달라졌다.
전 남편과 맥라렌에게서 각기 얻은 아들 둘을 키우면서 교직을 계속하던 그는 1971년 맥라렌의 제의로 런던 킹스로드에 [렛잇락(Let it rock)]를 내고 디자이너로 변신한다. 3년 뒤에는 펑키 스타일로 정착, `섹스`라는 이름의 부티크로 자리 잡았다. 1976년 그녀의 연인이자 비즈니스 파트너 맥라렌은 그가 매니저로 있는 영국 밴드 `섹스 피스톨스`의 의상을 그곳에서 구입하면서 그녀가 곧 스타 디자이너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이후 전세계에 펑크 열풍이 뜨겁게 달아올랐을 때 웨스트우드는 이미 패션 아방가르드의 프론티어로 인정받고 있었다.
1981년 첫 컬렉션 `Pirate`이 영국에서 열렸다. 그녀의 첫 무대는 전통적이면서도 독특한 아이디어로 비비안 웨스트우드의 명성을 확고히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1983년에는 파리에서 그녀의 컬렉션을 발표하며 Mary Quant 이래의 최고 영국 디자이너로 자리 잡게 되면서 세계 패션에 새로운 낭만주의 물결을 일으킨다. 1982년 컬렉션에서는 서구 패션사에 처음으로 비대칭 겹쳐 입기를 제시했다. 그해 남미 인디언에서 영감을 얻은 [버팔로 걸]에서는 스커트와 속치마를 겹쳐 입히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웨스트우드가 디자이너로서 한 단계 더 올라서게 된 것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펑크 패션에 이론적 배경을 제공했던 맥라렌과 손을 끊으면서 부터다. 그는 [맥라렌이 말로만 펑크를 외치고 있다]고 비판하며 [진짜 펑크 옷을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