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연맹국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6.10.22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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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가야연맹국에대한 조사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전기 가야연맹이 3세기 경에 김해의 가락국을 중심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우선 지적될 수 있는 것은 해상 교통 입지 조건이다. 3세기 당시의 『삼국지』 `위서 왜인전` 과 조선 후기 『택리지』의 기록으로 보아, 김해는 물결이 완만한 남해 및 서해의 해로를 이용하여 서해안과 남해안의 모든 항구와 교통할 수 있었고, 낙동강 입구로부터 거의 평형에 가까운 수로를 거슬러 올라가 내륙 각지와 연결할 수 있었으며,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의 쓰시마 및 북부 규슈로 향하는 출발점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김해의 가락국은 낙동강 유역 소국들의 관문과 같은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었다. 문헌 기록뿐만 아니라 출토 유물로 보더라도, 김해 지방에서는 중국에서 가져온 청동거울과 중국 화폐인 오수전 등이 발견되며, 일본에서 가져온 토기인 하지키와 벽옥제 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즉, 김해의 가락국은 중국의 낙랑군, 대방군으로부터 한반도 각지 및 왜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조선 초기의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김해 감물야촌과 창원 불모산의 사철 생산과 합천 야로의 철광 등을 기록하고 있으며, 『삼국지』 `위서 동이전` 에도 변한의 철이 한, 예, 왜, 및 중국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공급할 정도로 유명하였다고 전해진다. 창원, 김해, 부산 등지의 대형 목곽묘에서 다량의 납작도끼(板狀鐵斧)와 덩이쇠(鐵鋌) 등이 출토되는 것은, 그 지역에 존재하는 풍부한 철광자원의 존재와 연결시켜 보아야 한다. 김해의 가락국은 선진적인 제철 기술을 보유하고 이를 토대로 한 철 생산과 이에 바탕을 둔 대외 교역의 중심지로서 가야연맹의 발전을 선도하였던 것이다. 가야의 나라들은 통일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대외교섭의 주체나 창구도 하나는 아니었고, 복잡한 대외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가야제국은 문화적으로 서로 비슷했지만, 정치적으로는 독립적 이였다. 먼저 가야의 나라들 사이에 교섭이 있었을 것이고 그 다음에 삼국, 중국, 일본 등과의 교섭이 있었을 것이다. 가야의 대외관계는 전쟁과 외교로 진행되었다. 가야의 대외관계를 연대순으로 훑어보자.
가야의 각 지역에서 정치체가 등장한 것은 약 2,000년 전쯤이었다. 그러나 훨씬 이전에도 대한해협을 건너는 교류가 있었다.
참고 자료
http://www.gayasa.net
http://todori.inje.ac.kr/~kay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