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유득공과 발해고
- 최초 등록일
- 2006.08.30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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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머리말
Ⅱ. 柳得恭의 生涯와 時代的 상황
1. 榴得恭의 生涯
2. 時代的 상황
Ⅲ.柳得恭의 歷史認識과 著述
Ⅳ. 「渤海考」
Ⅴ.맺음말
《참고문헌》
본문내용
Ⅱ.柳得恭의 生涯와 時代的 상황
1. 生涯
유득공은 우리 역사에서 북학파의 한 사람으로, 그리고 이른바 4검서(檢書)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는 인물이다. 또한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는 4가(家)의 한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그의 행장(行狀)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불분명한 것이 많다. 현재로서 그의 행적을 추적할 수 있는 것으로는 그가 지은 부친 밎 숙부의 묘지명, 모친의 행장, 그리고 그의 글속에 여기저기 나타나는 단편적인 기록들이 고작이다. 그의 자(字)는 혜풍(惠風), 혜보(惠甫)이고, 호(號)는 영재(泠齋), 영암(泠菴), 가상루(歌商樓), 고운당(古芸堂), 고운거사(古芸居士), 은휘당(恩暉堂)등이 있다. 특히 고운당은 운동(芸洞)이라고도 불리던 교서관동(校書館洞, 지금의 충무로2가 부근)에 오랫동안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당호(堂號)이다.
부친 유춘(柳瑃)이 16세 때에 한 살 위였던 남양 홍씨와 결혼하여 8년만인 1748년 11월5일에 외아들 유득공을 낳게 된다. 이 때 유득공의 증조부인 유삼익(柳三益)과 외조부인 홍이석(洪以錫)이 서자였기 때문에 그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게 되었다. 이로부터 그의 생애는 대체로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먼저, 성장기는 그가 태어나서부터 20세기 전후까지를 이른다. 그가5세 때에 불행하게도 그의 부친이 27세를 일기로 요절하였고, 7세 때에 어머니와 함께 동작(銅雀)나루를 건너 남양(南陽)의 백곡(白谷)에 있는 외가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외가는 무반 집안이라 외숙들이 말달리고 매사냥하며 호기를 자랑하는 것을 보면서 자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보다못한 그의 모친이 그가 10세 되던 해에, 대대로 글짓기를 업으로 삼은 집안이니 이 곳에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하여, 이듬해에 서울로 올라오게 된다.
참고 자료
한영우, 『조선후기사학사연구』, 일지사, 1989
김기홍, 『새롭게 쓴 한국고대사』, 역사비평사, 1993
박찬승․한영우․조동걸 엮음, 『한국의 역사가와 역사학』, 창작과 비평사, 1994
柳得恭, 『渤海考』,홍익출판사, 2000
정진헌, 『실학자 유득공의 고대사 인식』, 새론서원, 19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