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공주 공산성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6.06.30
- 최종 저작일
- 20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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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공산성의 발굴유적과 연구현황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공산성(公山城)의 유적
3. 왕궁의 위치문제
4. 공산성의 축조시기
5. 웅진도성의 구조
6. 맺음말
본문내용
1. 머리말
개로왕(蓋鹵王) 21년(475년) 9월에 장수왕(長壽王)이 이끄는 3만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백제는 7일 만에 북성이 함락 당했다. 그리고 다시 한성이 함락되고 국왕이 전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신라로부터 원병 1만명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는 중이었으나 그가 왔을 때는 개로왕은 이미 죽고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이에 문주는 왕위에 오른 후 10월에 조미걸취(祖彌桀取)ㆍ목협만치(木協滿致)와 같은 중신들의 보필을 받아 부득이 남쪽의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었다.
웅진지역은 북으로는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고 있어 고구려와 신라로부터의 침략을 방어하기에는 천연의 요새지였다. 그리고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갈 수 있었고, 또 남쪽에는 곡창인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關防)뿐만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공산성(웅진성) 경덕왕 때 웅진(熊津)이 웅주(熊州)로 개칭된 다음 ‘웅(熊)’자 대신 미(美)자로 ‘공(公)’자를 선택하여 공주(公州)가 되었고 웅진성이 있던 ‘웅산’ 또한 ‘공산’으로 되었다. 그렇기에 백제시대의 웅진성이 곧 현재의 공산성인 셈이다.
이 어느 정도 축성되어 있었기 李南奭, 『熊津時代의 百濟 考古學』, 서경문화사, 2002
에 수도택지(首都擇地)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문주왕으로서는 웅진을 수도로 택할 수밖에 없었다.
3. 왕궁(王宮)의 위치문제
(1) 기존의 연구결과
왕성(王城)은 도성(都城), 혹은 왕도(王都)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이들의 개념은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최고 권력자의 거소(居所)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왕궁(王宮), 그리고 그 왕궁을 에워싸면서 축성된 왕성이 이렇게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웅진도성(熊津都城)에 대한 기왕의 연구에서도 왕궁의 위치를 확인하려는 노력이 다각도로 이루어져 왔다. 그 결과 왕궁의 위치에 대해서는 크게 보아 공산성 안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주장과 밖에 있었을 것으로 보는 주장이 맞서 있는 상태이다.
웅진시대 왕궁이 공산성 안에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輕部慈恩에 의해 처음 제시 되었다. 그는 현재의 공산성 동벽에 있는 외성 안쪽을 왕궁지로 추정하였다. 이곳에 평탄면이 조성되어 있어 여러 채의 건물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왕궁과 관련된 글자가 새겨진 명문와(銘文瓦)가 주변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 동쪽으로는 임류각지를 비롯한 백제 당시의 궁원지로 추정되는 곳이 있고, 다시 남쪽으로는 왕궁을 호위하는 병사(兵舍)로 추정되는 지역이 있다는 점도 방증자료가 되고 있다. 輕部慈恩, 「熊津城考」, 『百濟遺跡硏究』, 吉川弘文館, 1971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