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철학]전국시대의 제자백가
- 최초 등록일
- 2006.06.13
- 최종 저작일
- 20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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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법가와 명가 중심으로
목차
1. 법가
2. 명가
본문내용
1. 법가
(1) 법가의 학설과 당시의 사회, 정치, 경제 각 방면의 추세
유묵(儒墨)과 노장(老莊)은 각기 정치사상이 있다. 이 학파들의 정치사상은 서로 같지는 않지만 모두 인민의 관점에서 정치를 논했다. 오로지 군주와 국가의 관점에서 정치를 논한 사람을 당시에는 법술지사(法術之士)라고 불렀고, 한대에는 법가(法家)라고 불렀다. 법가의 학설은 제(齊)와 삼진(三晋 : 韓, 魏, 趙)에서 성행했다. 제나라 환공(桓公)과 진나라 문공(文公)은 모두 한 시대의 패주(覇主)였고, 제나라와 진나라 양국의 정치적 혁신과 진보 역시 반드시 상당한 성과가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시 현실의 정치추세를 이론화 하여 스스로 일파의 정치사상을 완성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주로 제와 삼진 사람이었다.
춘추전국시대에 귀족정치가 붕괴한 결과, 한편으로 평민은 해방이 되었고 한편으로 군주는 권력을 집중했다. 당시 현실의 정치추세는 귀족정치에서 군주전제정치로, 인물정치(人治)와 예치(禮治)에서 법치(法治)로 향하고 있었다. 대체로 원래의 봉건정치제도 하에서는 이른바 일국(一國)의 국토면적은 본디 매우 협소했고, 일국은 다시 몇몇 “가(家)”로 나누어졌다. 일국 내의 귀족들은 “어기거나 저버리지 않고 전통제도를 따랐으니”, 소위 예(禮)로서 국(國), 가(家)의 업무를 다스렸던 것이다. 농노의 경우는 오직 주인의 명령에 복종하고 혹사의 대상일 뿐이었다. 당시의 귀족은 위의(威儀)를 지극히 중시했다.
당시의 조직은 소위 국가 사회의 범위가 좁은 만큼 조직도 간단했다. 따라서 사람의 관계는 임금과 신하, 주인과 노예 사이를 막론하고 모두가 직접적이었다. 따라서 귀족들은 귀족에 대해서는 예를 갖추면 함당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농노에 대해서는 오직 위엄을 갖출수 있었다. 그러나 귀족정치의 파괴되고, 한편으로 일국의 군권(君權)이 점차 커지자 각국의 세습군주 혹은 한두 귀족들은 점차 정권을 나라의 중앙에 집중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인민은 점차 독립하고 자유롭게 되고, 국가사회의 범위는 넓어지고 조직은 날로 복잡해짐에 따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 역시 날로 소원해졌다. 즉 인물로서 사람은 다스리던 방법의 실행은 자연히 곤란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