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북학파 유득공
- 최초 등록일
- 2006.01.31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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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학파 유득공에 대한 모든것에 대하여 조사 작성한 리포트 입니다.
목차
◎유득공 [柳得恭, 1749~1807]
◎유득공의 생애와 업적
◎유득공이 역사에 공헌한 점
◎발해고 渤海考
◎유득공의 {발해고} 자서
본문내용
◎유득공의 생애와 업적
한문학사(漢文學史)에서도 4가(家)의 한 사람으로 지목되고 있다. 본관 문화(文化). 자 혜풍(惠風)·혜보(惠甫). 호 영재(冷齋)·영암(冷菴)·가상루(歌商樓)·고운당(古芸堂)·고운거사(古芸居士)·은휘당(恩暉堂) 등이다. 증조부와 외조부가 서자였기 때문에 서얼 신분으로 태어났다. 부친이 요절하여 모친 아래에서 자랐고, 18,19세에 숙부인 유련(柳璉)의 영향을 받아 시짓기를 배웠으며, 20세를 지나 박지원(朴趾源)·이덕무(李德懋)·박제가(朴齊家)와 같은 북학파 인사들과 교유하기 시작하였다.
1774년(영조 50)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었고, 정조가 즉위하여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한 뒤인 1779년(정조 3)에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됨으로써 32세에 비로소 신분 제약에서 벗어나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후 포천현감(抱川縣監)·양근군수(楊根郡守·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사도(司 寺)주부·가평군수(加平郡守)·풍천도호부사(豊川都護府使)를 역임하였고, 그를 아끼던 정조가 돌아가자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1807년(순조 7)에 60세를 일기로 사망하여 양주(楊州) 송산(松山:의정부시 송산동)에 묻혔다. 생전에 그는 개성·평양·공주 등과 같은 국내의 옛 도읍지를 유람하였고 두 차례에 걸쳐 연행(燕行)하고 돌아왔으니, 이 경험을 토대로 문학과 역사 방면에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유득공이 역사에 공헌한 점
유득공은 [발해고] 라는 책을 썼다.
그 책의 내용은 북쪽에는 발해 남쪽에는 통일 신라가 `남북국`을 이루고 있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는데 이 남북국시대 라는 말을 역사상으로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는 발해를 우리의 역사라고 말하지만 중국에서는 발해를 중국의 역사로 가르치
고 있다. 따라서 [발해고]에서 발해와 통일 신라가 언급된 점은 발해가 우리 나라의 역사임을 말해주는 중요한 자료이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큰 공헌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