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민중을 위해 삶을 바치다:)신채호의 역사의식
- 최초 등록일
- 2006.01.10
- 최종 저작일
- 2005.07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신채호의 생애와 역사의식 , 역사의식의 변화와 특징등에 다방면으로 조사,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1. 자주와 개혁의 이중과제
2. 생애와 항일역정
3. 역사의식의 변화와 특징
1) 역사발전론의 이해
2) 고대사인식과 강역의식
3) 민중직접혁명론
4) 무정부주의론의 수용
4. 요약정리
본문내용
1. 자주와 개혁의 이중과제
우리나라는 876년 문호개방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자발적인 의사가 반영되어 주체적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여러 면에서 일본의 이익이 반영되어 있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일본과의 문호개방을 시작으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에게도 차례로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러한 결과로 여러 신문명이 수입되고 이와 동시에 일본을 위시한 열강의 침입을 받게 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이 점에서 1876년 문호개방을 전후하여 우리에게는 외압과 자주라는 새로운 과제가 주어졌다. 그 과제는 국내적 과제에다가 다시 국외적 과제가 중첩되었는데 흔히 그것을 ‘자주’와 ‘개혁’의 이중과제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어려운 국가상황에서 우리의 선조들은 자신이 처해 있던 입장에 따라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우리는 여기서 특히 개화사상의 결정적인 한계였던 주체성의 상실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고, 역사의식에 있어 ‘주체성의 확립’문제를 정연하게 전개하였던 단재 신채호를 주목하고자 한다.
2. 생애와 항일역정
단재 신채호는 1905년 러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장지연의 초청으로 [황성신문]의 논설기자로 입사하여,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1908년에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게재하여 전통적인 유교사관을 비판하는 한편, 일제 식민주의사관의 허구성을 폭로하였고 1910년 국권피탈로 인해 국내에서의 활동이 어려워지자 신민회는 국외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추진하였고 신채호도 1910년 안창호, 이갑 등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1919년 3.1운동을 북경에서 맞이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하기 위해 상하이로 가서 임시의정원 의원 및 전원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0년대 중반 중국 사상계 및 한인 독립운동진영에는 무정부주의 이론이 풍미하였는데, 신채호도 유자명 및 중국 무정부주의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점차 무정부주의 사상으로 경도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