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이이의 고산구곡가
- 최초 등록일
- 2005.12.07
- 최종 저작일
- 199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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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이의 고산구곡가에 대한 연구한 글입니다.
목차
Ⅰ. 서언
Ⅱ. 율곡이이
1. 율곡이이의 생애
2. 율곡이이의 사상
3. 율곡이이의 문학관
Ⅲ.「고산구곡가」의 분석
1.「고산구곡가」의 내용
2.「고산구곡가」의 구조
3.「고산구곡가」의 의미
4.「고산구곡가」의 미 - 충담소산(沖澹瀟散)
Ⅳ.「고산구곡가」문학사적 의의
Ⅴ. 결언
본문내용
Ⅰ. 서언
「高山九曲歌」는 율곡(栗谷)이 선조 10년(1577) 42세의 나이로 해주로 퇴거하면서 지은 작품으로, 「陶山十二曲」과 함께 일찍이 학계에 널리 알려져 있어 이에 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져 왔다. 이 작품은 창작동기를 ‘先生作高山九曲歌 以擬武夷棹歌’ 이이, 「율곡전서(栗谷全書)」, 권 24.
라 밝혀 좋은 점과 또 이 작품에 있는 서곡에 있는 “으즈버 武夷를 想像고 學朱子 리라”라는 구절에서 볼 수 있듯이 주자의 무이도가를 모방하여 지은 것이다.
서사와 함께 총 10수인 연시조로 자연 풍경을 중요시하여 관암(冠巖), 화암(花巖), 취병(翠屛), 송암(松岩), 조협(釣峽), 풍암(楓巖), 琴灘(금탄), 文山(문산)의 아홉계곡의 경치와 풍경을 노래하였다. 본고에서는 율곡이이와 작품의 구조와 의미를 더불어 작품이 가지는 아름다움을 중점으로 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Ⅱ. 율곡 이이
1. 율곡이이의 생애
율곡 이이는 1536년(중종 31년) 강릉부 북평촌(지금의 오죽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공과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 1504~1551)은 7남매를 두었는데 율곡은 4남 3녀 중 셋째 아들이다. 이름은 이(珥),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 석담(石潭), 우재(愚齋)이다. 호인 율곡은 고향인 경기도 파주 율곡촌에서 따온 것이고, 처음 이름은 현룡(現龍)이었는데 11세 때 이(珥)로 바꾸었다.
율곡은 출생하여 오죽헌에서 자라다가 6세 때에 서울로 올라와 10년간 살았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여 신동으로 일컬어졌으며, 13세에 진사 초시에 응시하여 합격하였는데, 이후 9번이나 과거에 급제하여 9도장원공(九度壯元公 : 아홉 번 장원한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 16세 되던 해에 삼청동으로 이사하였고, 수운판관으로 임명되어 평안도로 출장가는 아버지를 따라 나섰다가 신사임당이 1551년(명종 6년) 48세의 나이로 갑자기 돌아가시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어머니를 경기도 파주시 동문리 자운산에 장사지내고 3년상을 지냈다. 모든 절차를 가례에 따라하여 상복과 삼띠를 벗거나 풀지 않았으며, 음식을 올리고 그릇을 씻는 등 모든 일을 노비들에게 시키지 않고 손수하였다고 한다.어머니의 죽음과 서모 권씨로 인한 고통에 시달리던 율곡은 18세에 봉은사를 찾아 불경을 읽기도 하였다.
19세 때 평생의 동지가 된 우계 성혼(牛溪 成渾 : 1535~1598)을 만나게 되고, 3년상을 마친 그 해 3월에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 공부를 하게 된다. 그 당시 중은 가장 천대를 받던 때이므로 이러한 행동은 대단한 용기를 필요로 한 것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