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광해군과 인조반정
- 최초 등록일
- 2005.11.22
- 최종 저작일
- 2005.04
- 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광해군과 인조반정, 그리고 진경사회에 대해.
목차
I. 序
II. 인조반정
1. 광해군의 생애
2. 인조반정
III. 진경사회
1. 이념적 배경
2. 문예부흥의 군주 정조 시대
본문내용
광해군은 1575년 선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혼이고 어머니는 후궁이던 공빈 김씨 였다. 소년시절의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이나 배다른 형제들에 비해 총명하고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광해군이 태어나던 해인 1575년은 조정에서는 이조전랑 자리를 놓고 정치적 분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이때 동인, 서인 나뉘게 되어 후에 붕당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에 침입하여 전쟁이 일어났다. 임진왜란의 발발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것은 역설적이지만 광해군에게는 행운이었다. 피난길을 모색하고 있던 다급한 상황에서 신하들은 민심을 진정시키기 위해 세자를 책봉할 것을 주장했다. 당시 선조는 왕위에 오른 지 벌써 25년을 넘기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까지 세자 책봉이 미뤄지고 있었던 것은 왕비 소생의 대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출의 장자였던 임해군마저도 성품이 너무도 거칠고 부덕하여 도저히 후사가 될 자질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차자인 광해군을 세우자니 그 역시 곤란한 점이 있었다.
광해군이 세자가 된 것은 여러 요인들로 인하여 힘입은 바가 크다고 볼 수 있겠다. 드디어 1592년 5월 20일 선조는 평양에 머물면서 광해군을 왕세자로 책봉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광해군은 세자로 책봉된 그 순간부터 공식적인 조선의 왕으로 설 때 까지 인정받지 못한 세자로 16년, 승인되지 못한 왕으로 1년, 그렇게 17년 이라는 가시 밭 길을 걸어야만 했다. 광해군의 정통성 즉 적자도 아니고 장자도 아닌 그의 위상의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위 계승자의 선정은 물론 조선자체내의 일이었지만 중국황제의 고명을 받는 것이 통과의례처럼 되어 있었다. 그래야만 조선국왕으로서의 자격과 권위를 부여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거의 형식적인 의례에 불과 했다. 그러나 유독 광해군에게 있어서 만은 그가 적자도 장자도 아닌 이유만으로 오랫동안 논란이 있었다. 전란이라는 비상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부득이 하게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책봉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채 세자로서 전시 임무를 수행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한명기, 광해군-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역사비평사, 2000
조여항, 정인홍과 광해군, 동녘, 2001
민족문화 추진회, 광해군 일기, 민족문화추진화, 1993
신봉승, 성공한 왕-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이성무, 조선왕조사, 동방미디어, 1998
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기획, 1998
박성순, 선비의 배반, 고즈윈, 2004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