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입문]최린 인물조사
- 최초 등록일
- 2005.10.27
- 최종 저작일
- 20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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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친일파 최린에 대한 간략한 인물조사와 그의 업적, 친일내용등을 조사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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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해방을 맞아 천도교는 최린을 친일행적의 속죄양으로 삼아 그에게 출교를 종용했다. 최린의 정치적 입지도 협소해졌다. 미군정은 최린을 일개 신흥종교의 교주로 치부할 뿐이었다. 옛 동지들이 집결한 한민당조차 자신들의 친일 컴플렉스로 인해 변절과 친일의 상징적 인물인 최린을 기피했다. 김구 역시 최린과의 협력을 거부했다. 이제 그가 유일하게 기대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은 `천도교청우당`이었다. 그러나 1946년 북조선천도교청우당이 결성되어 독자적인 활동에 들어가면서 그의 영향권을 벗어났다.
최린은 1946년 찬·반탁이 논란되던 정국을 틈타 교권탈환을 시도했으나 북한 천도교대표들의 서울행이 저지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947년 12월 유엔에서 유엔 감시하 남북한총선거안이 제기되자 최린은 북한지역에서 기득권을 회복할 수 있는 호기라며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했고 북한당국은 유엔한국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다. 최린의 분노의 화살은 소련과 북한 당국을 향했다. 공산주의를 박멸해야 할 악성전염병인 매독과 같은 것이라고 주장할 만큼 그의 반공의식은 철저했다. 1948년 2월 최린은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에게 밀사를 파견했다. 그는 3월 1일 북한지역 천도교인이 총궐기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총선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을 요구하며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국을 환영하는 평화시위운동을 전개할 것을 지시했다. 소위 `3·1재현운동`이 그것이다. 북한 천도교 지도자들은 최린의 지시를 거부했다. 이러한 사실이 북한 당국에 탐지되면서 상당수의 천도교 지도자들은 감시와 탄압을 피해 월남해야 했다. 최린의 북한정권 전복기도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천도교 비밀결사인 `영우회`를 결성하여 인민군의 무기를 탈취하여 유격대를 결성하는 등의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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