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 송시열에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5.09.13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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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송시열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1. 위기 속에서 태어난 송시열 (선조40년-1607년)
2. 고집스런 가풍과 첫 번 째 스승인 아버지
3. 송시열의 스승들
4. 효종과의 만남 (1635년)
5. 송시열의 출사
6. 북벌론과 예송논쟁
7. 송시열의 적: 반주자학자 윤휴와 사문난적
8. 숙종과의 충돌
9. 83세 (1689년 숙종15년) 에 당한 죽음
10. <조선왕조실록>에 3000번 오른 송시열과 그의 영향
11. 송시열에 대한 대조적인 평가
1) 그의 학문이 높아서 최고의 유학자이다
2) 스스로 대의명분 내세웠지만 사사로운 이익만 추구했다
12. 결론및 나의 의견
참고문헌
본문내용
임진왜란 (1592)의 영향으로 사대부 중심의 조선 지배 체제가 근본적으로 뒤흔들렸다. 평소에 백성들을 엄격한 신분제로 옭아매던 국왕과 사대부들이 막상 왜군이 쳐들어오자 대응 한번 변변히 못하고 무너진 데 대한 민중들의 분노와 반란으로 인해 조선 사회는 비단 왜적의 침입뿐만 아니라 그 내분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후기 조선 사회를 이끌었던 사대부 송시열의 인생이 주목받아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가 이런 상황에서 태어났다는 점에 있다. 송시열은 선조 40년 (1607년) 11월 12일에 충청도 옥천군 이원면 구룡촌에 있는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조선에서 남녀차별이 심화된 것은 조선 후기의 일이었고 당시만 해도 외가에서 해산하는 일이 그리 드문일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이 오십의 늙은 선조와 혼인한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음으로써 엄청난 파문이 일어났다. 광해군이 세자였으나 서자출신이었던 반면 영창대군은 선조가 바라던 적자였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실권을 잡고 있던 북인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로 갈렸다. 1602년 선조가 죽자 광해군 즉위 후 실세로 부상한 대북정권은 인목왕후의 아들 영창대군이 살아있으면 그를 추대하려는 역모가 일어날것이라고 생각했고 회유에 넘어간 박응서가 인목대비의 아버지 김제남과 연결해 영창대군을 추대하려 했다는 자백을 하여 인목왕후의 친정은 멸문의 화를 입었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귀양간 후에 불에 타죽었다.영창대군이 죽은지 4년후 광해군은 인목대비 김씨에게 대비라는 존호를 폐한후 서궁에 유폐시켜 버린다.성리학을 숭상하는 조선에서 어머니를 폐위시킨 것을 대북정권의 결정적 실수였고 눌려지내던 서인들에게는 반정을 일으킬수 있는 좋은 명분이 되었고 결국 서인들은 선조의 서손인 능양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1623년 반정을 일으키고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를 가게 된다.이로써 능양군은 임금에 오르게 되고 그가 조선 16대 임금 인조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