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마천
- 최초 등록일
- 2005.06.16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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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따끈한 자료에요^^
목차
☆사마천☆
(백과사전)
☆사 기☆
▶ 사기의 우수성 - 문학적
▶ 사마천의 사학사상
1. 역사 변혁관
2. 소박유물론
3. 인민에의 동정, 역사에 대한 인민의 작용 인정
4. 봉건전제의 잔학 난폭한 흑막을 폭로함
▶ 사마천의 역사관
☆산 문☆
산문의 종류 :
개개 산문의 개관 :
▶ 정론문(政論文)
▶동주(東周) 문학
▶ 기사(紀事)의 글
▶입언(立言)의 글
본문내용
“내가 죽거든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거라. 태사가 되면 내가 저술하고자 했던 것을 잊지 말아라...”
사마담은 자신이 태사령으로서 완수하고자 했던 사기의 저술을 자기를 대신해 끝마치도록 아들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무제 원봉 3년인 기원전 108년, 사마천은 아버지의 직을 이어 태사령이 되었다. 37세가 되던 해였다.
사마천은 그 후 역법개정을 맡게 되었고 이 역법개정을 계기로 본격적인 사기저술에 착수하고 작업은 기원전 99년 [이릉의 사건]이 일어날 때까지 6년간 계속되었다. 사기의 저술은 기원전 104년, 사마천이 그의 나이 42세에 시작되었다.
뜻하지 않은 이릉사건으로 이릉을 변호한 것이 무제의 미움을 사 황제를 무고했다는 죄명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때 그의 나이 마흔 일곱살 이었다.
당시 사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돈 오십만 냥으로 감형 받는 것과 궁형을 받아 환관이 되는 것이었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사마천은 부친의 유언을 따르고 다 이루지 못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여 환관이 되었다. 부형(腐刑)이라 불리는 궁형은 사람이 당하는 모욕 가운데 가장 심한 형벌이었다.
궁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사 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궁형의 치욕을 견디며 사기를 완성하여 후세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면 그 치욕을 보상받을 수 있다는 일념으로 발분하여 사기를 완성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