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감 진흥책
- 최초 등록일
- 2005.05.16
- 최종 저작일
- 2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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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국자감의 성립과 발달
2. 국자감 쇠퇴의 원인 - 사학의 발달
3. 국자감의 정비와 사학의 개편
4. 국자감 진흥책
본문내용
4. 국자감 진흥책
(1) 숙종 - 국자감에 서적포 설치
* 서적포(書籍)
고려시대의 국자감(國子監)에 두었던 출판부.
1101년(숙종 6년) 국립대학인 국자감 안에 서적포를 설치하고, 비서성(書省)에 소장되어 있던 모든 책판(冊板)을 이곳에 옮겨 널리 인쇄 보급하게 하였다. 서적포를 설치한 것은 비서성의 책판이 쌓여서 훼손되고, 사학(私學)의 번성으로 상대적으로 위축된 관학(官學)을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
(2) 예종 - 국자감 → 국학 개칭, 국학 7제, 양현고 설치, 청연각과 보문각 설치
* 양현고(養賢庫)
고려시대의 장학재단(獎學財團). 예종 14년(1119) 사학(私學)의 융성으로 위축된 관학(官學)의 진흥을 위하여 설치하였다. 예종은 이전의 국자감(國子監)을 국학으로 고치면서 일대 개혁을 단행, 많은 학생을 수용할 수 있는 학사(學舍)를 신축함과 동시에, 학생의 교육 및 국학의 재정적 뒷받침을 위하여 국학 안에 이 관청을 설치, 당시의 유학생(儒學生) 60명과 무학생(武學生) 17명의 뒷바라지를 하게 하였다. 처음에는 2명의 판관(判官)을 두었으나, 고종 30년(1243)에는 4명을 더 두어 2명은 양현고에 딸린 전지(田地)로 파견하여 수세(收稅)와 양곡의 운반을 맡게 하였고, 2명은 양현고에 남아 있으면서 이를 받아들이고 관리하도록 하였다. 고려 말에 국학이 쇠퇴하고 양현고의 재원도 고갈되자 안향(安珦)은 섬학전(贍學錢)을 양현고에 귀속시켜 교육진흥을 꾀하였다.
* 칠재(七齋)
고려시대 국자감(國子監)에 설치한 7개의 전문강좌. 예종 4년(1109) 7월에 국학교육의 진흥을 위하여 국자감(國子監)내에 설치하였다. 《주역(周易)》을 전문적으로 가르치던 여택재(麗澤齋), 《상서(尙書)》를 강의하던 대빙재(待聘齋), 《모시(毛詩)》의 경덕재(經德齋), 《주례(周禮)》의 구인재(求仁齋), 《대례(戴禮:禮記)》의 복응재(服應齋), 《춘추(春秋)》의 양정재(養正齋) 등 6재와 병학(兵學)을 강의하던 강예재(講藝齋)를 7재라 하였다. 이 가운데 앞의 6재를 유학재(儒學齋), 병학의 강예재를 무학재(武學齋)라고도 하여 문․무 양학으로 구분하였으나, 유학재의 학생수는 60~70명이었던 것에 반하여, 무학재는 8~17명에 불과하였다. 설치한 첫 해에는 최민용(崔敏庸) 등 70명의 유학생과 한백순(韓白純) 등 8명의 무학생이 입학하였다. 예종 14년(1119) 7월에는 국학내에 양현고(養賢庫)를 설립하여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고 학사(學舍)를 갖추었다. 무학재는 금(金)나라에 대한 사대외교정책으로 무인관료군의 필요성이 감소되자 인종 11년(1133) 폐지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