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광해군에 대한 재평가
- 최초 등록일
- 2005.05.11
- 최종 저작일
- 20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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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 재평가
목차
1. 광해군은 폭군이었는가.
2. 광해군을 위한 변론
1) 선조와의 갈등
2) 대북파의 성장
3. 절대왕정 복권을 위해 노력한 민생군주
4. 광해군의 실리 외교
1) 배경
(1) 당시의 국제 상황
(2) 광해군의 반명 감정
2) 대외정책 (중립 외교)
(1) 후금
(2) 명
3) 대명외교의 파장
(1) 인조반정
(2)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3. 다시 돌아본 광해군
본문내용
광해군이 인조반정을 통해서 쫓겨나고 이후 폭군, 혼주로 불리게 된 원인 가운데 중요한 것이 바로 토목공사와 관련된 것이다. 1608년 즉위했던 직후, 그는 왜란 당시 불타버린 종묘의 중건을 마쳤고, 부왕 선조가 시작한 창덕궁 중건사업을 재개하여 1611년 완성하고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창덕궁 중건을 마친 뒤에는 다시 창경궁을 중수하는가 하면 돈의문 안에 경덕궁 (후에 경희궁으로 불림)을 지었다. 뿐만 아니라 정원군(광해군의 이복동생이자 인조의 아버지)의 사저가 있던 인왕산 부근에 왕기가 있다는 풍문을 듣고 인경궁을 지었고, 북학 자리에는 자수궁을 짓는 등 궁궐을 짓는데 대단한 집착을 보였다. 궁궐 사업에 대한 광해군의 집착은 광해군이 왕위에 있던 시대가 임진왜란 직후라는 사실, 왜란 당시 경복궁과 창덕궁등 주요 궁궐들이 불에 타버려 국왕들이 거처할 마땅한 궁궐이 없었다는 사실과 그의 소심하고 예민한 성격과 관련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란 중에 겪었던 간난신고, 맏아들 아닌 상태에서 왕세자가 되었던 콤플렉스, 선조와의 미묘한 갈등, 적자 영창군의 출생과 유영경 일파의 공작, 이런 저런 핑계로 왕의 승인을 미뤘던 명 조정, 즉위 후에도 그치지 않았던 역모사건 등으로 그는 소심해졌을 뿐만 아니라 운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