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조형의식] 근현대 건축물로 본 한국인의 의식구조
- 최초 등록일
- 2005.03.31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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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근현대의 건축물을 보면서 한국인의 의식의 변천을 살펴보았다.
목차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문
1. 서구 개항기
2. 일본 제국주의 건물
3. 해방 이후 건축
4. 국제주의 건축과 전통
5. 도시 확충과 건축기술의 정착(1971 ~ 1980년)
6. 대형 건축물과 다양성
Ⅲ. 맺음말
본문내용
Ⅰ. 들어가는 말
사람은 건물 안에서 살아간다. 이것은 대단히 일반적인 이야기로 들린다. 그리고 사람이 살아가는 건물은 그 사회 사람들의 의식을 들어내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나라는 근현대를 거치면서 서구 제국주의에 밀려 식민지 시대를 겪게 되었다. 그리고 급속한 근대화를 거치면서 우리의 의식이 어떤 변화를 겪으며 왔는지 조형물들을 통해서 우리의 의식의 변화를 살펴볼 것이다.
Ⅱ. 본문
1. 서구 개항기
조선은 세도정치를 겪고, 고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그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였다. 이 때 두 차례의 양요를 겪으면서 조선은 쇄국정책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하지만 이 정책은 흥선대원군의 하야로 막을 내리고 그 뒤를 이은 민씨 정권은 개항을 하게 된다.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개항은 서구문물이 그대로 쏟아져 들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서구세력과의 수교도 매우 불평등한 조약들을 체결하게 되었다. 이러한 수교로 각국의 공사관이 들어서게 되었다.
1) 공사관
공사관들은 가장 중요한 정치적 중심지에 세워진다. 특히 러시아 공사관의 경우 을미사변 이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사건(아관파천) 때문에 더욱 유명하다. 조선후기 가장 조선에 영향을 많이 끼쳤던 국가이기도 하다. 러시아 공사관의 경우 덕수궁 서쪽의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하얀 탑을 올려 고종의 왕궁을 은연중에 감시하였다. 공관의 핵심은 탑부에 있다. 비록 3층의 탑이었지만 공관이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탑부는 서울 전체를 조망할 수 있었다.
2) 종교 건물
1886년 프랑스와 수교를 하면서 프랑스에게 천주교 포교권이 인정되었다. 이것을 시작으로 천주교가 정식적으로 공인되어서 확산되었다. 그에 따라서 종교건물 - 특히 천주교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다. 1890년에는 종현(명동)에 2층의 벽돌조로 주교관을 지었고, 1892년, 용산의 신학교(현 성심회 수녀원)와 약현 성당(현 중림동 성당)을 준공하는 한편 명동 성당을 착공하였다. 일제시대의 종교도 다른 모든 문화와 마찬가지로 탄압을 받는다. 특히 민족말살정책이 실행되었던 1930년대 후반부터 광복 전까지는 많은 탄압을 받았다.
참고 자료
네이버 백과사전
우리건축을 찾아서 발언출판사 2000년 9월 재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