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회와 문화] 일본인과 천황
- 최초 등록일
- 2005.03.29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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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I. "천황"이라는 명칭에 대한 주변국의 반응
1. 중국
2. 우리나라
3. 결론
II. 천황은 백제인 이었나?
1.일본을 건국한 천황은 누구인가?
2. 일본 천황가의 원류를 밝혀주는‘화상경’
3. 일본 천황 응신
4. 결론
III. 메이지 시대의 천황홍보
1. 되살아나는 신화
2. 천황홍보의 필요성
3. 사진의 활용
IV. 일본인과 천황
1. 근대 천황제의 성립 배경과 천황의 역할
2. 전후 일본의 상징적 천황제
3. 현대 일본에서 상징천황제가 지니는 이미지
4. 현대 일본에서 천황이 가지는 정치성
5. 현 일본의 천황제가 지니는 모순성과 나아갈 방향
본문내용
전후 정착된 상징천황제는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논란의 주된 내용으로는 궁극적으로 전후를 전전과 연속된 것으로 볼 것인가 단절된 것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나아가 이러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그러면 어떤 방향으로 사회를 이끌어가야 하는가 하는 당위성의 문제에까지 관련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런 중대한 논란거리와 문제점들을 내포하면서도 상징천황제는 일본사회에 정착되었다. 일본국민들 사이에서는 당초 천황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았던 데다, 국민주권을 전제로 한 상징천황제는 민주주의와 상충되지 않는 제도로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상징천황제의 정착에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 구축이었다.
천황과 황실의 새로운 이미지는 주로 매스컴을 통해 형성되었다. 그것은 민주적이고 근대적이며 인간적인 이미지, 즉 전후의 새로운 가치의 부합되는 이미지였다. 특히 대중들에게 친밀감을 안겨줌으로써 상징천황제의 정착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것은 황태자의 결혼과 대중매체 TV의 보급이었다.
1958년 황태자와 쇼다 미치코라는 여성의 약혼을 계기로 매스컴은 이들의 만남에서부터 나날의 동정에 이르기까지 경쟁적으로 보도했고, 이듬해의 결혼식은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 되었다. 배우자가 평민이었다는 점, 황실내의 결혼이 남다르지 않은 정경으로 일반 대중들에게 전해졌다는 것이 국민들에게 황실의 변화를 보여주는 실감 사례가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