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보고
- 최초 등록일
- 2005.01.15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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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서주희는 이야기한다. 왜 보지라는 말을 마음 놓고 쓸 수 없냐고. 꼭 사람들이 이 단어를 쓰지 않고 다른 대명사나 지칭어를 쓴다. 거기, 거시기, 조개, 가리비, 홍합, 옥문, 꽃두덩이, 씹, 냄비.... 아주 각양각색이다. 북한은 몸틈새라고 한다고 한다. 보지라는 말을 쓰지 않기 위한 선인들의 눈물겨운 노력을 엿볼 수 있다. 서주희는 묻는다. 이것이 과연 사람들이 선천적인 부끄러움 때문이냐, 그렇지 않으면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사회적인 억압 때문이냐고. 형식적으로는 묻고 있지만 실상 후자의 이미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묻기 전에 여성의 억압을 화제로 하고 있었고 이 이야기를 묻고는 바로 여성이 성폭행 당하는 연기를 하니까. 그러나 이러한 금기어의 사용은 여성이기 때문에 겪는 억압이 아니다. 보지라고 말 못 하듯이 남자도 자지라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비단 보지 만이 아니라 정액이니 귀두라니 하는 단어들도 금기어의 대상이다. 자지라는 단어도 마음 놓고 쓸 수 없으니까 꼬추, 거북이, 똘똘이, 곧휴 등 변용해서 쓴다. 서로의 성기가 언급되는 빈번한 정도도 똑같다. ‘좆같아.’ 라는 말이 있듯이 ‘씹쌔끼’라는 말도 있다. 이것은 여성의 억압 문제가 아니라 품위의 문제이다. 지저분하거나 성적이기 때문에 금기되는 말들을 구지 여성의 억압과 연결시키는 건 과장된 꿰맞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연극은 성을 과감하게 직시하며 동시에 그 성이 천박하고 말초적인 성이 아닌 진지하게 고찰해보면서 즐기는 성이라는 점에서 대단히 높은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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