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해
- 최초 등록일
- 2004.11.11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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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바이마르 공화국의 탄생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
3. 상대적 안정기
4. 바이마르 공화국의 붕괴
본문내용
2. 바이마르 공화국의 위기
(1) 정치적 위기
사진 2) 가혹한 강화조약에 분노하는 베를린 시민들. 플래카드에는 ‘14개조만을’이라 씌어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은 우익 세력으로부터 심각한 공격과 도전을 받았다. 지주, 관료, 산업 자본가, 군부 등 기득권 층으로 구성된 우익 세력은 군주주의자, 보수주의자, 민족주의자, 군국주의자들로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존재 그 자체를 부정하고 나왔다. 베르사유 조약이후 우익 출판물들과 집회활동 중에는 굴욕적인 강화에 반대하는 선동과 관련해서 ‘등뒤의 칼’ 전설에 대한 선전활동이 빈번해졌다. 그것은 싸우고 있는 전선의 등뒤를 후방(사회주의자 지식인 계층)이 칼로 찔렀기 때문에 강화조약의 책임은 좌익 세력에게 있다는 논리였다. 1차 대전의 영웅인 힌덴부르크 장군은 국회에서의 증언에서 그러한 1차대전에서 독일의 패배원인을 설명하기도 하였다. 보수주의적, 국수주의적 우익세력들로부터 그들이 짊어져야 하는 전쟁책임을 벗겨줄 ‘등뒤의 칼’ 전설은 그들에게 아주 유리한 이중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하나는 이 전설을 이용해 제정시대 독일의 정치, 군사적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명백한 실패를 호도할 수 있었고, 이에 의해 구질서가 면책될 수 있었다. 또 하나는 그들은 혁명세력과 바이마르 공화국의 담당자들에게 패배의 책임을 돌리고, 참을 수 없는 현재의 불행의 책임을 전가할 수 있었다. 당시 집권여당이었던 사회민주당은 온건파 좌익세력이었기 때문에 패전의 책임에 대한 우익의 비난에 대해 자유로울 수 없었고, 새로운 공화국은 처음부터 국민의 지지를 상실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