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근대사] 명대(明代) 내각과 환관, 인민의 저항
- 최초 등록일
- 2004.10.18
- 최종 저작일
- 20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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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발표 준비하면서 제출용으로 만든 자료입니다.
자세하게 설명하려 노력했고, 주석도 빠짐없이 달았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목차
1. 머리말
2. 황제권의 양축(兩軸)
(1) 내각(內閣)
(2) 환관(宦官)
3. 토목(土木)의 변(變) : 1449年
4. 명대(明代)의 백성들의 저항
(1) 등무칠(鄧茂七)의 난(亂)
(2) 형 양(荊 襄) 유민봉기(流民蜂起)
(3) 유육 유칠(劉六 劉七) 반란
(4) 민변(民變)
5. 대례(大禮)논쟁
6. 장거정(張居正)의 개혁
(1) 내정면
(2) 재정면
(3) 대외정책
(4) 한계
7. 동림당(東林黨)
(1) 탄생 배경
(2) 활동
(3) 한계
8. 맺음말
본문내용
황제일원적 지배가 시작된 이후 모든 국사를 총괄하게 된 황제에게는 자연 그 업무의 보조자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황제의 가장 측근집단인 환관이 정치에 개입하고, 황제의 비서관으로 출발한 내각이 정치에 참여하게 되어 명대의 황제독재체제는 환관과 내각이라는 두 사적 기구를 버팀돌로 하여 가능하였다. 환관은 황제의 총애를 받아 전횡을 일삼아 뇌물을 수수하고 황제의 사적 이익추구를 돕는 등 부패를 드러냈으며, 황제의 비서 기능을 행하던 내각은 장주(章奏)에 표의(票擬)를 하게 되면서 정책결정기구로서 기능하게 되었고 관료계의 정점에 위치하게 되어 가정초 대례의 논쟁의 경우와 같이 황제와 대립하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명대 이갑제적 전제지배체제의 해체 위기 아래에서 장거정은 황제 일원적(一元的)인 전제지배체제의 강화에 의한 부국강병으로 위기를 타개하려 했고, 동림 복사는 향촌의 공론과 이익이 보장되는 분권공치의 정치주장으로 상황을 해결하려고 했다. 하지만 장거정의 전권정치에 대한 반대에서부터 명조의 당쟁은 기원하고 그 점에서 명조의 전제지배체제는 만력기(萬曆期)부터 붕괴하기 시작하였고, 상공업 상품경제 발달에도 불구하고 폐정(弊政)과 사회 모순 심화로 인하여 각종 민란(民亂)이 확대되었으며 통제력이 약화된 명제국은 이와 같은 혼란 속에 북방민족의 세력 확장에 무너지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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