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와 카톨릭
- 최초 등록일
- 2004.10.09
- 최종 저작일
- 20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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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신대륙 발견과 선교
1.1. 신대륙 발견 당시의 유럽상황
1.2. 신대륙 발견 초기의 상황
2. 식민통치하의 선교상황(1492-1808)
2.1. 정복자들을 동반한 선교 출발
2.2. 노동력 착취에 맞선 원주민 보호 노력
2.3. 교회의 재산과 운용
2.4. 지역교회화의 노력
2.5. 교회와 스페인 문명과의 갈등
2.6. 식민지의 카톨릭 신앙
3. 독립국가의 탄생
3.1. 부르봉왕조 쇠퇴와 독립운동
3.2. 독립전쟁과 교회
3.2.1. 주교들의 반응
3.2.2. 성직자들의 태도
3.3. 새로운 정부와의 관계
3.4. 교황청의 반응
4. 1825년부터의 교회의 움직임
4.1. 독립국가들과 교회
4.2. 보편적 종교상황
4.3. 교황청의 태도변화와 선교활동의 재개
4.4.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 발생
4.5. 주교회의의 태도
4.6. 라틴아메리카의 새로운 사목적 요구
4.7.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메델린 문헌'과 해방신학
본문내용
한편으로, 메델린회의나 해방신학의 움직임에 대한 라틴아메리카 교회 내부의 반응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일단 보수주의 성직자들은 교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소극적 실천방안을 제시한 반면, 개혁주의자들은 광범위한 사회활동과 현장운동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 당시 쿠바혁명의 성공과 각 국에서 세력을 확대해 가는 그리스도교 민주당은 해방신학이 확산할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되었다. 이런 바탕에 콜롬비아의 신부 카밀로 토레스는 "카톨릭 신자가 혁명적이지 못하면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하는 것이다"는 말과 함께 총을 들고 직접 게릴라 운동에 뛰어든다. 또 이 시기 브라질을 중심으로 확산되던 기초공동체들은 의식화에 기여하면서 다수의 무장투쟁세력을 양산하기도 한다. 이런 움직임에 대해서 각 국의 우파 세력들은 혁명을 우려했고, 인디오 농민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중미와 안데스 국가들에서 신부와 수녀들에 대한 암살사건이 빈번히 발생한다. 엘살바도르의 군부는 '신부를 죽여 애국자 되자'는 구호를 외치기도 하면서 급기야 1980년에 로메로 대주교와 4명의 미국인 수녀를 살해한다. 이런 현실참여와 그에 뒤따른 수난의 역사는 1970년의 암울한 라틴아메리카의 상황에서 교회가 민주화에 대해 유일하게 희망을 걸 수 있는 상징적인 곳으로 떠오르게 된다. 절대권력자들도 교회 전체를 없앨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교회의 모든 구성원이 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