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전쟁 이전 당과 토번의 관계, 당과 토번의 대비천 전투, 나당전쟁 당시 당의 한반도 방기론 검토
- 최초 등록일
- 2023.02.22
- 최종 저작일
- 202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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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당전쟁 이전 당과 토번의 관계, 당과 토번의 대비천 전투, 나당전쟁 당시 당의 한반도 방기론 검토"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나당전쟁 이전 당과 토번의 관계
Ⅲ. 당과 토번의 대비천 전투
Ⅳ. 나당전쟁 당시 당의 한반도 방기론 검토
Ⅴ.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나당전쟁은 675년 9월 매소성 전투를 고비로 일단락된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매소성에 주둔하던 당군은 20만 명에 달하였으며, 말갈족 출신 이근행이 인솔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의 군마 3만여 필을 노획하고, 이후 전투에서 18번을 싸워 모두 이기고 6,000여 명을 목 베었다고 한다. 국내학계에서는 매소성 전투가 나당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고, 반면 당은 매소성 전투의 패배 결과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이동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당의 한반도 지배야욕은 좌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매소성 전투는 나당전쟁의 결정적 교전으로, 당군은 이 전투에서 대패하였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국외학계에서는 매소성 전투를 바라보는 시각이 이와 전혀 다르다. 당으로서는 당시 서북의 토번(티베트)이 더욱 중요했기 때문에 동북의 한반도는 방기되었다는 것이다. 즉 당의 군사전략의 중심이 동북에서 서북으로 대전환되었으며, 이러한 국제정세 속에서 매소성 전투가 발생하였으므로 매소성 전투에 대한 이해는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내학자 서영교는 이러한 국외학계의 견해를 수용하고, 국제정세의 변동 속에서 나당전쟁을 조망하고자 하여, 나당전쟁을 인식하는 데 있어 시야의 확대를 가져왔다.
참고 자료
서영교, 「나당전쟁과 토번」, 『동양사학연구』, 2002
이상훈, 「나당전쟁의 종전배경과 신라의 역할」, 『동북아역사논총』, 2011
정병준, 「토번의 토욕혼 병한과 대비천 전투」, 『역사학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