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대 한국 영화와 일본인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22.06.02
- 최종 저작일
- 202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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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화사 과목 2021-2학기 A+받은 레포트입니다. 직접 작성하였습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1920년까지의 한국 영화
2. 민간 영화사 설립과 영화 제작에서 일본인의 역할
3. 한국영화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과 인식
4. 합작의 유행과 제작 분업화
Ⅲ. 결론
Ⅳ. 참고문헌
본문내용
서론
‘한국 영화사’ (개화기에서 개화기까지)의 발제 범위를 읽는데 문득 일제 시대 한국의 영화와 일본과의 관계가 궁금해졌다. 일제 시대 조선 영화와 일본인의 관계는 다양한 면에서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본 보고서에서 조선영화와 일본인의 관계를 다각도로 살펴보려 한다.
본론
- 1920년까지의 한국 영화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식민지 조선에서는, 한국인들에 의한 연쇄극의 제작과 흥행 성공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1923년 4월 9일 민중극단을 이끌었던 윤백남 감독의 극영화 <월하의 맹서>(1923년)가 개봉되면서 조선인 주도의 극영화 제작 활동도 활발해졌다.
하지만, 이전에 조선에서 영화 제작에 움직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00년대만 해도 버튼 홈즈 일행이 영화 상영을 위해 대한제국 황실을 방문하기 앞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며 촬영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또한 요시자와성점과 요코타상회의 순희영사대 기사들이 이토 히로부미의 의뢰를 받아 기록영화를 촬영한 바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례들은 한반도에 적을 둔 사람이나 단체에 의해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후의 활동과 구별된다. 1910년대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의 움직임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운영자인 가네하라 긴조가 조선에 와서 가네하라를 신설하고 연예부, 영업부 등과 사진부를 꾸려 활동 및 환등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姜泰雄. (2014). 식민지 조선영화 연구와 제국일본. 일본학보, 100, 135-143.
함충범. "식민지 조선영화와 일본인의 관계 양상 연구." 국내박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9.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