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김옥균의 생애와 활동
- 최초 등록일
- 2003.12.03
- 최종 저작일
- 20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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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김옥균의 생애와 활동
1. 개화파 지도자로서의 김옥균
2. 갑신정변 지도자로서의 김옥균
3. 망명시기 김옥균의 활동과 그의 최후
참고 - 19세기 초중엽의 경제 형편
1. 상품 화폐경제의 발달
2. 농업경영의 새로운 추세
3. 수공업분야에 발생한 자본주의적 경영형태
본문내용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에서 출생하였고, 6세 되던 해에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올라갔다. 그가 16세 되던 해인 1866년에 셔먼호 사건과 불란서 함대의 무력침공 사건이 벌어졌다. 봉건제도가 붕괴하며 자본주의적 요소가 장성하고 있던 새로운 전환기에 태어난 김옥균이 봉건제도에 대한 비판과 그를 개혁하고자 할 때 실학사상을 접하게 됨으로써 그는 변혁을 요구하는 시대의 정치활동가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전제가 되었다. 나라를 혁신할 길을 모색하던 김옥균의 사상생활에서 전환의 계기를 열어놓은 것은 대치 유흥기 등 개화사상가화의 만남이었다. 이 때부터 김옥균은 자본주의적 방향으로 발전하는 세계 정세를 연구하고 또한 실학사상을 계속 연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무대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은 과거에 응시하여 22세 되던 1872년에 정치에 입문하여 홍문관 교리, 사간원 정언, 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역임하여 청년 정치가로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대원군 정권이 무너지고 민씨 정권이 들어서면서 봉건적 위기는 격화되었으며, 민족적 위기도 심화되었다. 이러한 정세 하에서 김옥균은 나라를 근대적으로 변혁하는 것이 역사발전의 요구라고 자각하고 국가변혁을 위한 실천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여. 그리하여 1874년경에 개화파의 형성을 보게 되었고 그 지도자가 김옥균이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