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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앙대학교 한국사 A+ 레포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론 -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란?
1.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등장배경
2. 반민특위의 개념
Ⅱ. 본론 - 영화 ‘암살’ 속 반민특위의 존재
1. 반민특위의 활동 내용
2. 반민법의 실패, 반민특위의 와해
Ⅲ. 결론 - 영화‘암살’의 장르적 특성과 적정성
본문내용
1945년 8월 15일 광복, 우리 민족은 고통스러운 일제의 지배를 벗어나 진정한 자유와 권리를 되찾았다. 해방 후, 자주적인 정부의 수립은 우리 민족의 최우선적인 과제였다. 그에 따라, 친일파 청산은 한반도의 필연적 과제로 대두되었고 당시 사회에서는 그를 위한 움직임이 점점 활발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움직임도 잠시, 다시 한반도는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일본의 빈자리를 미국이 차지한 것이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정에 대하여 매우 회의적이었다. 또 다시 한반도가 식민지배화 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이러한 수많은 우려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까지 미군정은 3년 동안 한반도 남한지역을 통치하였다.
군사 통치 3년 동안, 미군정은 수십년 동안 일본이 한반도를 점령하였기에 한반도를 스스로 자립할 수 없는 나라라고 판단하여 일제의 잔재인 식민지 통치기구, 제도와 시설이 남한을 효율적으로 통치하는 데 적합하다고 여겨 그대로 남겨두었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 때 주요 관직을 차지했던 친일파들을 그대로 다시 주요 관직에 등용하였으며 해방 직후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생겨난 인민위원회·치안대 등 각종 자치기구들을 강제로 해체시켰는데, 이는 우리 민족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염원을 좌절시켰다.
미군정은 치안유지법·사상범예방구금법 등 일제가 만든 악법들을 폐지하기도 했으나, 신문지법·보안법 등은 존속시켜 군사 통치에 활용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결성됨에 따라 미군정의 군사 통치는 막을 내렸지만, 결국 미군정의 군사 통치는 한반도의 질서유지와 효율적 통치라는 명분 속에서 친일세력에게 유리한 입지를 마련해주는 반역사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미군정이 종결된 후, 대한민국 정부는 이승만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회가 형성되고, 과거 일본제국주의 즉, 일본의 식민지정책과 대동아전쟁에 충성했던 친일세력들을 처벌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졌으며 그에 따른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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