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언론사 연구 요약문
- 최초 등록일
- 2021.09.13
- 최종 저작일
- 20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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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 초기 언론사 연구 요약문"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I. 大諫制度의 성립과 그 기능 분석
1. 머리말
2. 대간제도의 성립
3. 사간원 직제의 성립
II. 대간의 실제 기능
1. 대간의 언론 활동 : 대간언론 활동의 의의와 방법
2. 간쟁에 관한 언론
3. 탄핵에 관한 언론
4. 시정에 관한 언론
5. 인사에 관한 언론
III. 대간의 언론활동 이외의 기능
1. 참정기관의 기능
2. 정치논의 참여
3. 시신의 기능
4. 서경기관의 기능
IV. 법사의 기능
V. 백관에 대한 규찰
VI. 국문
VII. 결송
VIII. 맺음말
IX. 토론 주제
본문내용
저자는 이 장에서 언관으로서 대간의 기능을 밝히는 작업을 중심으로 하였다. 대간을 언관이라 하는 것에 대해서 대간의 직무를 언론에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당시 제도나 실제적인 면에서 언관으로서의 기능이 중요하게 인식되었기 때문이라 보았다.
기존에 있던 연구가 법제적 측면에 치중되어있거나, 또는 내용이 소략하여 대간의 실상을 파악하기 어렵다고 파악하였고, 그렇기에 위에 논문들에 구애되지 않고 조선 초기의 대간제도의 실체를 새로 구명하고 논설하였다. 여기서 조선 초기는 개국에서 『경국대전』의 완성까지를 뜻한다.
먼저 언관제도의 기원을 중국의 제도에서 찾았다. 그러나 중국의 언관제도는 처음부터 언론과 대관을 두어 언론을 행한 것은 아니었다. 간관제도는 唐⸳宋대에 이르러 정비되었으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간관의 좌우를 나누어 좌는 門下省에, 우는 中書省에 속하였으며, 宋代에는 한때 문하성을 諫院으로 삼은 일도 있다.
중국의 제도에 영향을 받은 고려의 관제에는 門下府郞舍의 職掌이 간관의 任을 담당하게 되었다. 常侍, 直門下, 司議大夫, 給事中, 舍人, 起居注, 起居郎, 起居舍人, 正言 등이 낭사였고, 직명은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이와 같이 문하성의 낭사는 唐⸳宋대 문하성과 중서성의 직제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신라시대에도 대관제도와 비슷한 것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나 조선시대의 대관제도는 중국의 제도에서 그 연원을 찾는 것이 타당하다.
주대 의관직에는 ‘御史’라는 직함이 있으나 법령을 장악하고 조사를 짓는 일을 하였으므로 대관이라 할 수 없다. 週末 戰國時代에는 ‘紀事之織’이었고 秦⸳漢代에 ‘糾察之任’을 갖게 되었다. 漢에서는 관서를 御史府 또는 御史大夫史, 후한에서는 御史臺 또는 蘭臺寺라 했다. 제도는 당대에 와서 정비 되어 어사대는 직품에 따라 관장하는 일이 나누어졌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