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령 전설의 현장과 의미
- 최초 등록일
- 2021.08.25
- 최종 저작일
- 20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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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역사 속의 김덕령
2. 김덕령의 고향에서 채록한 이야기
3. 김덕령 이야기의 의미
본문내용
김덕령(金德齡) : 1567(선조 즉위)~1596(선조 29).
본관은 광산. 자는 경수(景樹). 아버지는 붕섭(鵬燮)이다.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고경명(高敬命)과 연합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전주에 이르렀다가 어머니를 공양하라는 형의 권유에 따라 귀향했다.
1593년 다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떨쳤다. 1594년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으로부터 호익장군(虎翼將軍)의 호를 받고, 이어서 선조로부터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그뒤 남원에 머물다가 진주로 옮겼는데 조정에서 의병을 통합하여 충용군에 속하도록 하여,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영남 서부지역의 방어임무를 맡았다. 곽재우와 협력하여 수차에 걸쳐 적의 대군을 무찔렀고, 1595년에는 고성(固城)에 상륙하려는 일본군을 기습하여 격퇴시켰다. 1596년 도체찰사 윤근수(尹根壽)의 노속(奴屬)을 장살(杖殺)하여 투옥되었으나, 왕명으로 석방되었다. 그해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몽학(李夢鶴)을 토벌하려 했으나, 오히려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충청도순찰사 종사관 신경행(辛景行)의 무고로 서울에 압송되어 옥사했다. 역적이라는 누명을 쓰고 죽었다.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민첩하며 신용(神勇)이 있었다고 하여 용력에 대한 전설적인 이야기가 많다. 1661년(현종 2) 신원(伸寃)되었다.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으며, 1681년 병조판서가 더해졌다. 광주 벽진서원(碧津書院)에 제향되었는데,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