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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에도막부의 대(對)서양 교류 연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머리말
2. 에도막부와 네덜란드
3. 대(對)서양 교류의 특징
4. 문물 수용의 영향
5. 맺음말
본문내용
우리는 일본을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부분 가까우면서도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할 것이다. 실제로 서울과 도쿄 사이의 직선거리는 약 1,160km로, 수치상으로는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이렇게 지리적으로 한국과 일본은 상당히 가깝고, 교과과정에서는 동아시아 문화권에 속한 일본을 이해하기 위해 동아시아사 과목에서 일본사를 과거보다 깊이 다룬다. 그런데, 우리는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라는 질문에 선뜻 좋은 답을 못한다.
그러한 요인으로 임진전쟁과 그리고 일제강점기를 든다. 이는 모두 일본의 대(對)서양 교류와 유관하다. 전국시대의 유력 다이묘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남만 무역’으로 포르투갈과 교역했다. 포르투갈과의 무역, 특히 조총의 유입은 중국의 왕직에 의한 것이란 주장도 있지만, 일본과 서양이 직ㆍ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노부나가가 혼노지(本能寺)의 변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주군인 오다 노부나가에게 반란을 일으켜 그를 죽게 한 사건을 뜻한다.
으로 살해된 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 전쟁을 일으키며 동아시아 정세는 변화했다. 에도(江戶) 막부는 서양 중 유일하게 네덜란드와 나가사키의 데지마(出島)에서 교역하며, 난학(蘭學)을 비롯한 서양의 과학기술을 들인다.
조선과 청 왕조가 서양 교류를 부정적으로 인식한 것과 달리, 일본은 서양 교류에 거부감이 없었다. 19세기 삼국이 서양의 침입을 겪었고, 조선과 청 왕조는 열강의 반(半)식민지로 전락했지만,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해 제국주의의 반열에 올라선다. 서양 문물이 일본 사회에 자리 잡은 것이 이후 메이지 유신의 성공 배경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는 에도 막부 시기를 네덜란드와 교역함으로써 얻은 변화를 확인한다. 그리고 그 변화가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난학이 본격적으로 수용된 18세기를 중심으로, 해당 시기에 진행된 서양 문물의 유입은 분명 한국, 중국에 유입된 그것과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따라서 일본의 서양 문물 도입이 가진 특징을 분석하고, 그 영향을 평가할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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