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남한의 3년과 이승만
- 최초 등록일
- 2020.07.04
- 최종 저작일
- 20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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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45년 8월 15일 한국은 일본의 패전과 함께 광복을 맞이한다. 광복을 맞이했지만 한국은 그야말로 카오스 그 자체였다. 국제정세는 한국이 자주적인 독립국가가 되는 과정까지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지만 한국의 지도자들은 한국이 자치능력이 결여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기에 치열한 대립이 있었다. 결국 차선책으로 미국과 소련은 남북을 나누어 각각 군정을 실시했다. 이후 남북의 대립뿐만이 아닌 각 진영 안에서의 갈등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46년 3월 20일부터 5월 6일까지 미소 공동위원회가 24차례에 걸쳐 진행되었지만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하고 미국과 소련의 팽팽한 기싸움으로 끝이 났다.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은 정읍에서 처음으로 ‘남한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구상을 제시한다. 이후 그는 1946년 12월, 신탁통치 포기와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자신의 주장을 다시 한번 굳히고, 자신에게 불리하게 돌아가는 국내의 정치적 상황을 바꾸기 위해, 1946년 12월 초 미국을 방문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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