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사이드 선교사 (W.H. Forsythe) 선교학 연구
- 최초 등록일
- 2020.07.03
- 최종 저작일
- 20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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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선한 사마리아인 윌리엄 해밀턴 포사이드가 주고 간 뜨거운 사랑
2. 한국 교회를 향한 포사이드의 모범
3. 나의 생각
본문내용
* 척박했던 호남선교 돌파구 마련
1909년 4월의 일이다. 유진벨(bell, eugene, 배유지) 목사와 함께 의료선교로 광주와 전남지역 복음화의 새 장을 열어가던 오웬(owen, clement carrington, 한국명: 오기원) 선교사가 쓰러졌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3월 22일 광주를 출발하여 화순, 남평을 지나 장흥에 도착했던 오웬 선교사가 순회 선교사역 도중 급성 폐렴으로 위험에 처했다는 것이다. 예상외로 상태가 심각해지자 의사를 보내어 달라는 급보를 보내온 것이다. 전보는 목포선교부로 전달되었고, 연락을 받은 포사이트(forsythe, w. h., 보위렴) 선교사가 4월 4일 조랑말을 타고 광주로 향했다.
1898년 11월 6일, 미국 남장로회 소속 선교사로 내한하여 목포 선교부에 부임했던 오웬 선교사, 1년 뒤인 1899년 현대식 의료센터인 목포진료소를 개설하여 전라남도 최초의 서양 의료 진료소를 운영했으며, 10년 후인 1909년에는 191평 규모의 번듯한 석조양옥의 ‘부란취(富蘭翠)’ 병원을 개원시켰다. 그때 당시 동료였던 의학박사 윌리엄 해밀톤 포사이드가 ‘프렌치 메모리얼’의 기부를 받아 병원을 개원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었다.
오웬은 의료선교의 여세를 몰아 1904년 12월 19일 유진벨과 함께 광주로 이주하였고, 광주지역에서는 제중병원(현, 기독병원)의 시작이 있게 한 장본인이다. 비록 현재의 기독교 병원 건축은 오웬이 숨진 3년 뒤인 1911년에 이루어졌지만 호남선교사에 지울수 없는 족적을 남겼다. 오웬과 포사이트가 활역했던 일제 강점기 동안 목포에는 목포부립병원이 있었지만 이는 주로 일본인들을 위한 병원이었고, 부란취 병원은 조선인들을 위한 병원이었다고 한다. 당시 매년 7~8천명의 환자들을 진료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