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 봉건의미 연구
- 최초 등록일
- 2020.06.29
- 최종 저작일
- 20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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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후기 봉건의미 연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서 론
Ⅱ. 봉건의 의미
1. 공(公)으로서의 봉건
2. 열작분사“列爵分土”-번병“藩屛”으로서의 봉건
3. 이전“井田”으로서의 봉건
Ⅲ. 『입재유고』를 통해 본 봉건
Ⅳ. 결 론
참고 문헌
본문내용
전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국가체제에 대한 논의는 봉건제와 군현제로 나뉘어 이루어졌다. 봉건제는 이상적인 유교통치가 실시되었던 三代에 시행되었다는 국가체제이고, 군현제는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나라에서 시행되었던 국가체제였다. 봉건제와 군현제에 대한 논의는 국가와 사회 전반에 관한 거의 모든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예컨대 정치권력의 집중에 대한 문제, 군주와 신하의 위상 정립에 관한 문제, 復古와 時勢의 문제, 정전 및 인재선발에 관한 문제들이 있었다. 이러한 복잡한 문제들과 결부된 봉건제와 군현제에 대한 논의는 논자들 사이에서 쉽게 결정될 수 없었다. 그것은 당시 시대적 과제와 논자들이 처한 역사적 배경에 따라서 그 논의가 갖는 정당성이 변화하였기 때문이다. 봉건•군현제 논의는 중국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는데, 특히 급격한 사회 변혁기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에서도 명말청초 시대에 봉건•군현제 논의가 국가체제와 관련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왕조 교체의 상황에서 비판적 지식인들은 국가체제 전반에 대해 반성적으로 검토했다. 조선후기 지식인들도 명청 교체기에 중국에서 전개된 봉건•군현제 논의에 대해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특히 주목하였던 것은 명말 청초 사상가인 고염무의 군현론이었다. 또한 당나라 사상가인 유종원의 봉건론도 주목되었다. 중국과 일본에 비해서는 다소 제한적인 면이 있었지만 조선후기 지식인들의 봉건•군현제 논의도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봉건•군현제 논의를 살펴보면 그들이 어떻게 국가시스템을 발전시켜 나가고자 했는지를 추론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하지만 봉건•군현제 논의와 관련한 연구는 부족하다. 우선 박광용은 18~19세기 지식인들의 봉건•군현제 논의를 당색별로 정리하여 노론은 원론적 봉건제를, 남인과 소론은 군현제와 절충적 봉건제를 지지했다고 보았다. 이 연구는 봉건•군현제 논의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하지만 당색을 먼저 분류하고 논자들의 견해를 분석하다 보니 모든 사례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는 한계가 지닌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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