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작가론에 대한 모든것
- 최초 등록일
- 2020.06.24
- 최종 저작일
- 20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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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문학작가론에 대한 모든것"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최치원
2. 김부식과 정지상
3. 삼은
4. 여류문인
5. 작가들의 전반적인 삶과 느낀점
본문내용
최치원은 신라시대 말기의 학자이자 서예가이다. 최승우 · 최인연 등과 함께 신라 말기에 문명을 떨쳤던 삼최 중의 한 사람이다.
868년에 12세의 어린 나이로 도당 유학하였다. 어렸을 때 정민하였고 학문을 좋아했다 국자감의 태학에서 공부하면서 스승을 쫒아 학문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18세에 유학 7년 만인 874년에 생도시 진사시에 급제하였다. 과거 합격 후 바로 관직에 나가지 못했는데 이 시기에 꾸준히 저술을 남겼다. 과거 합격 후 표수현위가 되기 전까지 2년간 동도인 낙양 등지를 유랑하면서 시작(詩作)에 몰두하여 금체시(今體詩)5수,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 등을 지었으며 표수현위에 임명된 이후에는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5권을 쓴 것으로 전한다. 짧은 시간에 많은 저술을 남길 정도로 문재(文才)가 뛰어났지만 당나라에서 본격적으로 문명(文名)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황소의 난(亂) 이후였다. 황소의 난이 발발하자 종사관으로 서기(書記)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서기의 임무를 맡은 이후 토황소격(討黃巢檄)을 비롯하여 각종 표(表)·장(狀)·서계(書啓)·징병(徵兵)·고격(告檄)·거첩(擧牒) 등의 문장을 모두 저술하여 당나라 전역에 문명을 떨치게 되었다.
29세 되던 885년에 신라로 돌아왔다. 귀국 후 당나라에서 쌓은 경험을 토대로 신라의 발전을 위해 의욕적으로 노력했던 것으로 전한다. 그러나 진골귀족 중심의 신분체제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다시 사신으로 당나라에 가는 등 이때부터 이미 외직을 돌며 현실 정치에서 점점 멀어지는 행보를 보였다.
894년에 귀국 후 10여 년 동안의 신라 관직 생활을 통해서 알게 된 당시의 문란한 정치 상황을 개혁하기 위해 진성여왕에게 시무책(時務策) 10조를 올렸다. 그 공으로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까지 올랐으나 그 개혁안은 진골귀족들의 반발로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