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 선초의 신진사대부(정몽주와 정도전을 중심으로)』
- 최초 등록일
- 2020.05.09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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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여말 선초의 신진사대부(정몽주와 정도전을 중심으로)』"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들어가며
2.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분화
3. 정몽주
(1) 염락이학(濂洛理學)과 경학적 학문 기조
(2) 정명사상(正名思想)과 춘추정신(春秋精神)
(3) 결론
4. 정도전
(1) 정도전의 생애와 활동
(2) 정도전의 혁명사상과 건국철학
(3)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의 활약과 최후
5. 나가며
본문내용
1. 들어가며
고려 말기는 내부적으로는 권문세족으로 인한 사회적 폐단이 극에 달해 백성들은 곤궁했고 조정은 무능한 상태에 있었다. 외부적으로는 중국대륙을 지배하는 원나라가 쇠퇴하고 새로 명나라가 건국되는 혼란기였다. 이 시기 고려에서 기존의 사상과는 달리 새롭게 성리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대거 등장했는데, 이 때 등장한 사람들을 신진사대부라고 했다. 신진사대부들은 고려왕조 내 사회적 폐단으로 인한 곤궁과 혼란을 개혁하려고 했으나 방법에 대한 이견을 갖고 있었는데, 이것이 정몽주(鄭夢周)로 대표되는 온건 개혁파와 정도전(鄭道傳)으로 대표되는 급진 개혁파라는 두 집단으로 나뉘었다. 본 발제문에서는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정도전·정몽주의 사상 비교, 조선왕조의 건국 이후의 신진사대부들의 변화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2. 신진사대부의 등장과 분화
고려 후기 개혁정치의 추진은 아직 중앙 정계에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한 신흥관료(新興官僚)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즉 향리(鄕吏)출신을 비롯한 한미한 가문출신 관료들이 개혁세력이 되어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영향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이들은 세족(勢族)출신 사대부와는 달리 아직 문벌화(門閥化)하지 않은 가문배경의 소유자였으며, 특히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현실 비판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을 사대부 층의 한 갈래로 계보화할 수 있을 것이며, 이를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로 지칭할 만하다. 이제현(李齊賢)과 이색(李穡)을 중심으로 하는 공민왕대 신진사대부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었다. 우선 이들은 좌주(座主), 문생(門生)관계 등 과거를 매개로 결속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또한 이들은 대부분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충렬왕대 주자성리학이 도입된 이래로 널리 보급되고 있던 성리학은 공민왕대에 와서 그 연구가 심화되고 확산되면서 당시 사대부는 이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민왕대 개혁정치를 통해 강력한 정치세력으로 성장한 신진사대부는 우왕대 이인임(李仁任) 정권이 등장하면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이인임 정권은 족당(族黨)세력을 형성하여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경제적 부를 독점하고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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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지식산업사』, 1999.
·김영수,「여말선초의 역사적 도전과 실천 성리학 :정몽주와 정도전의 <歷史-天道>論을 중 심으로」, 『한국정치연구 제10집』, 서울대학교 한국정치연구소, 2000.
·김광철, 「개혁정치의 추진과 신진사대부의 성장」,『한국사 19』국사편찬위원회, 2003.
·정성식, 「포은과 삼봉의 철학사상」,『심산문화』, 2003.
·오영교, 「조선건국과 경국대전 체제의 형성」,『혜안』,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