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신학사상사_정초기의 신학자 및 사상
- 최초 등록일
- 2020.04.17
- 최종 저작일
- 20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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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소금 유동식 전집 한국 신학의 광맥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국 신학자들의 신학 사상을 요약 및 정리한 과제물입니다.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중간시대
2. 남궁혁
3. 1930년대 신학계
4. 변홍규
5. 정경옥
6. 김창준
7. 박형룡
8. 김재준
Ⅲ. 결론
본문내용
Ⅰ서론 : 정초와 위기
1930년대는 한국신학계가 성서관의 확립, 학문적 초석을 다지는 정초(定礎)기를 맞이하게 되면 서 동시에 일제 탄압에 의한 시련기를 가졌다. 창씨 개명, 신사참배, 그 외의 한국사회가 혼란에 휩쓸림과 함께 교회가 경험한 시련의 시기는 1930년대에서 1950년대에까지 이르는 긴 기간이 었다. 이로 인해 한국 교계의 성장은 주춤하는듯 보였으나 그 가운데서도 탁월한 신학자와 저서 를 다수 배출하였다. 외국에서 공부를 마친 유학생들이 그동안 쌓아온 학문적 자산을 가지고 돌 아오면서 한국 신학계에는 다양한 신학 노선들이 등장하고, 충돌하며 발전하게 되었다. 한국 교 회는 이제 서구 선교사들로부터 독립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기 시작하게 되었다. 아래에서는 이 시기 속에서도 대표적인 인물들의 사상과 공헌을 살펴보고자 한다.
Ⅱ본론
1. 중간시대
양주삼이 한국인 최초로 신학논문을 발표했던 기념적인 사건 이후로 한국 신학계는 다시금 긴 침 묵기를 지나게 된다. 한국신학의 발아기와 정초기 사이에 놓인 중간시대라 할 수 있는 1920년대 의 한국 신학계는 여전히 선교사들에게 의존하고 있었다. <신생명>이라 하는 월간지가 발간되는 획기적인 사건이 있었으나 짧은 수명에 그치게 되었다.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신학 활동은 선교사 들에 의해 독점되어 있었는데, 가령 장로교는 전문적이고 주도적인 한국인 신학자를 양성하기 보 다는 보조적인 위치에 머무르도록 하는 방침을 택하는 등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남궁 혁의 귀국은 이러한 정적인 상황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2. 남궁혁
남궁혁은 1866년 배재학당에 입학, 졸업한 후엔 인천 세관과 목포 세관에서 일하다가 그곳에서 만난 선교사를 통해 입신하게 되었다. 1918년 평양신학교에 입학 및 졸업한 후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와 유니온 신학교에서 각각 1년씩 공부하게 된다. 이후 1925년 모교인 평양신학교로 돌아 와 최초의 한국인 교수로 부임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소금 유동식 전집 | 소금 유동식전집편집위원회 (엮은이) | 한들출판사 | 2009년 6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