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1. 김남천의 생애 -연표
1.2. 김남천의 생애
1.3. 김남천과 임화 그리고 「물」논쟁
1.4. 1930년대 문인들의 자아비판, 그 사이의 김남천
1.5. 김남천의 창작방법론
① 고발문학론
② 모랄론
③ 풍속론
④ 로만 개조론
⑤ 관찰문학론
1.6. 김남천의 문학사적 위치
2.1.「대하」의 줄거리
2.2.「대하」의 등장인물
2.3. 작품 분석
2.4. 결혼·연애 모티브의 기능
2.5.「대하」의 문학사적 위치
3. 참고문헌
본문내용
김남천은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주도세력이었다는 이유로 남북 양쪽에서 잊혀진 채로 수십 년 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근래에 다시 활발히 연구되고 있는 1930년대 문단의 중심 작가이자 비평가이다.
그는 1911년 3월 6일 평안남도 성춘군 성천면 하부리(또는 하야리)에서 태어났다. 아호는 파붕(巴朋) 혹은 파붕생(巴朋生)이며 본명은 김효식(金孝植)이다. 남천이라는 이름은 필명이다. 그는 인간의 성격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는 소년 시절을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지는 고향에서 비교적 유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렇기 때문에 소년 시절을 보낸 전원적인 고을 정경은 그의 인품이나 문학의 형태를 형성하는 데 기본 바탕이 되었다. 수많은 그의 소설 작품에서 아늑한 고향 그리기가 나타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대하에서도 그러한 고향 그리기가 나타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던 해에 한재덕 등의 반 친구들과 「월역(月域)」이라는 동인지를 냈다. 한재덕은 후에 김남천을 카프 동경지부에 관련을 맺어 준 인물이다. 이 시기에 「단오」「명절」「늦은 봄」「약자행」「어머니의 아해」등 열편이 넘는 작품을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 초기 습작들은 모작의 범위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그에게는 안타깝게도 문학적인 스승이 없었다. 평양고보에서 수학하는 도중 스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나 결국 유야무야되었다. 양주동, 김동인, 주요한 중 한 사람을 스승으로 모셔도 되었다. 하지만 세 명 다 결국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그의 문학수업에 있어서나 작가생활에 있어서 한사람의 스승도 갖지 못하였다.
중학을 졸업할 즈음 신흥문학에 흥미를 느끼게 된 김남천은 동경으로의 유학을 목표로 삼고 평양고보를 졸업하게 된다. 졸업 후 동경으로 건너가 호세이 대학 예과에 입학한다. 그러나 이념과 사상의 충돌 속에서 학업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입학 3년만인 1931년에 중퇴를 하고 만다.
김남천을 카프 동경지부에 주선한 사람은 「월역(月域)」의 동인이었던 한재덕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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