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일본의 만행 - 위안부
- 최초 등록일
- 2018.09.21
- 최종 저작일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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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나의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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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사람들의 시위 현장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시위를 통해 일본에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과의 대답은 아직까지 들려오고 있지 않다. 현 시점에서 우리는 왜 아직까지 위안부 문제가 거론되고 해결되지 않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솔선해서 몸을 바치는 부대'를 정신대라고 하였는데
이는 일제가 전쟁을 위해 동원한 인력 조직이었다. 남녀 모두 그 대상이 되었는데, 이 중에서 여성으로만 구성된 경우를 여성정신대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여성정신대가 대부분 일본군 위안소로 연행됨에 따라 정신대라는 말은 자연스럽게 일본군 위안부를 지칭하는 용어로 굳어졌다.
하지만 원래 위안부의 의미는 나라를 위해 몸 받친 부대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사전적 의미와 다르게 강제적으로 행해진 것이다. 이 당시 일본은 군국주의에 취해서 중일전쟁, 2차 세계대전에 뛰어들게 되는데, 처음에는 식민지의 남자만 군인으로 차출하다가 나중에는 전시동원체제로 식민지의 전 국민을 전쟁에 동원하게 되었다. 여자의 경우, 군인으로 할 수 없으니 다양한 일, 즉 식량, 군수물품 등의 생산, 보조, 지원의 일을 하게 하고 그 중의 일부를 속이는 식으로 끌어들여서 군대의 공창으로 만들어버렸다. 전선에 나가 있는 병사들의 성욕을 해소하기 위한 도구 그것이 군사력에 도움이 된다라는 이상한 논리로 조선의 여성들을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강제로 끌려간 여성들은 여관이나 창고 등에 감금되었다가 목적지로 수송되었는데, 서울과 부산 쪽이 대부분 이였으며, 조선인 정신대들은 군병참부의 책임 하에 군용화물열차나 수송선으로 목적지에 옮겨졌으며, 이들은 하나의 화물로 취급되었다.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집에 앉아 있다가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조선인 여성들은 각 지역의 연대에 적당하게 배치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 하에서 조선인 위안부들은 때로는 하루에 20명이 넘는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죽도록 매질을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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