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매체 자료
- 최초 등록일
- 2018.09.15
- 최종 저작일
- 20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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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신문을 비롯한 TV, 라디오, 잡지의 4대 매체 시대가 다채널 다매체 시대로 급속하게 변하면서 광고시장에도 커다란 전환기를 맞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매체가 출현하고 있기 때문인데, 신문이 창간되기 전까지 숭례문 일대는 가장 효과적인 광고센터였다. 구한말 전차역이 생기면서 숭례문 일대에 사람들의 내왕이 번다해지자, 전신주에는 더덕더덕 광고지가 붙었고 앞뒤에 광고판을 내걸은 이른바 샌드위치맨들이 모여들었다. 당시 가장 성행했던 것은 의약품 판촉과 색주가의 호객행위였다.
개화 바람을 타고 숭례문 일대에 외국인의 출입이 잦아지자 조정에서 광고 활동을 금지했다. 그러자 마포나루와 숙정문 밖에 집단으로 거주하던 기녀들은 색동이라 불린 어린 소년들에게 울긋불긋한 옷을 입혀 한양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과천과 양주까지 내보내 호객행위를 하였다.
이후 독립신문 등이 창간되면서 신문 광고가 선을 보였는데, 외국에서 들여 온 새로운 문물인 의류와 구두, 그리고 화장품의 광고전이 치열했다. ‘아미녀가 단골인 나비표를 모르십니까’라는 분(粉) 광고는 조선 팔도에 명성이 자자했던 평양기생 아미녀를 모델로 한 광고였다.
신문광고는 ‘동아일보’가 창간되면서 본격화되는데, ‘부인무시절대불가(婦人無視絶對不可)’란 큰 글씨 아래 ‘일천만 남자에게 엄중 항의하자’는 상당히 도발적인 내용을 담은 ‘부인백보환(婦人百補丸)’ 광고처럼 여성 소비자를 일깨우는 내용이 많았다. 따라서 우리나라 광고의 변천사는 곧 여권 신장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신문 광고 초창기에는 성병과 관련한 약품 광고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여 당시의 문란한 성생활과 성의학의 수준을 알 수 있는데, ‘여러분은 밑 빠진 물통의 인생을 사시렵니까. 그 물통에다 평생 물을 붓고 사시렵니까’라는 임질약 광고가 대표적이었다.
성병과 관련한 약품 광고가 많았던 것은 최초의 한국인 의사 가운데 한 명인, 세브란스병원에 근무하던 오긍선 박사의 충격적인 연구 결과로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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