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정국에서 건국까지의 정치세력
- 최초 등록일
- 2018.01.01
- 최종 저작일
- 20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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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1) 한국민주당
(2) 임시정부세력과 한국독립당
(3) 이승만
2) 좌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1) 조선공산당
(2) 조선인민당과 근로인민당
(3) 조선신민당
(4) 삼당합동과 남조선노동당
3) 중도세력과 좌우합작운동
(1) 국민당
(2) 미․소공동위원회 이전의 좌우합작 노력
(3) 좌우합작위원회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우익 정치세력의 노선과 활동
(1) 한국민주당
광복직후 가장 먼저 정치활동을 시작한 동아일보그룹의 핵심 인사였던 송진우는 미군의 상륙을 앞두고 1945년 9월 16일 한국민주당(한민당)을 결성하고 천도교 기념관에서 1,600여 명의 발기인이 참여한 가운데 창당대회를 개최하였다. 초기 한민당은 ‘지주·자본가 및 친일파’ 정당이라는 좌익 정치세력의 비난과 달리 다양한 정치세력이 참여하였다. 친일을 하지 않았던 국내의 우익인사들이 한민당에 대거 참여하게 된 요인에는 공산주의에 반대한다는 이념적 동질성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와 인민공화국(인공)이 좌익세력들에 의해 독선적으로 운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9월 22일 중앙집행위원회를 개최, 11개의 부서장과 중앙감찰위원 30명을 선출하였으며, 1945년 11월 초 광주를 시작으로 다양한 지역에 지방지부가 조직되어 1946년 말까지 53개의 당지부를 결성, 당원수가 창당시 5만 명이라고 신고한 것에서 23만명으로 증가되었다.
한민당의 주요 정치노선은 첫째, 인공 즉, 좌익 세력에 대한 반대노선이다. 한민당은 우익 정치세력의 결집체였으므로 광복 직후 좌익의 결집체였던 인공에 대한 반대를 중요한 정치노선으로 삼았다. 둘째,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이다. 당시 실질적 힘을 갖고 있었던 미군정과의 협조노선이 필요하였으며 정치적으로 좌파와 소련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군정과의 연합이 불가피하였다. 또한 한민당의 참여인물 가운데 많은 수가 식민지 시기 일본이나 미국에서 유학한 경험을 갖고 있어 미군정이 이들 보수주의자들의 영어실력을 필요로 하기도 했다. 셋째, 자본가와 지주에 기반한 경제정책노선이다. 대부분의 정치세력들이 토지문제에 있어서 무상분배를 골자로 하는 농지개혁과 중요 산업의 국유화를 내세워 대중적 지지를 얻고 있었으나 한민당은 미·소공동위원회에 제출한 ‘임시정부의 정강’에서 ‘유상매수·유상분배’, 재산권에 있어서 ‘배타적 소유권의 확립’, 산업부문에 있어서 ‘농토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계획적인 전화’등을 내세웠다.
참고 자료
이동화, [8.15를 전후한 여운형의 정치활동], {해방전후사의 인식}(한길사, 1980)
김광식, [8.15 직후 정치지도자들의 노선비교], {해방전후사의 인식} 2(한길사, 19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