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혁명의 전개, 민국초의 정치
- 최초 등록일
- 2017.09.23
- 최종 저작일
- 2017.05
- 6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목차
1. 공화혁명의 전개
2. 민국 초의 정치
본문내용
1. 공화혁명의 전개
⓵ 무창 봉기 (1911. 10. 10)
- 신해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사건
- 호북성의 중심도시인 무창에서 일어난 신군(新軍)의 봉기
- 다수의 혁명단체가 문학사(文學社)와 공진회로 귀결되어 신군을 주요 대상으로 삼고 활동
- 혁명파에 의한 꾸준한 선전과 조직 공작이 사병과 하급사관에게 수용되어 봉기가 가능
- 11일과 12일에, 인근한 한양(漢陽)과 한구(漢口) 장악
⓶ 호북군정부 수립 (10. 11)
- 제조중이던 폭약이 폭발, 지휘부가 궤멸된 상태에서 봉기가 일어남
- 혁명 주도 세력은 하사관급으로 정치적 영향력 발휘할 수 없었고, 손문이나 황흥 등 혁명 지도자와 연락이 되지 않았음
- 그래서, 혁명에 피동적으로 참여한 자의국 의원들과 협의해 청조의 최고위 장교인 여원홍 을 군정부 도독으로 추대
③ 혁명군의 위기
- 청조는 음창(蔭昌)을 제1군, 풍국장(馮國璋)을 제2군으로 하여 혁명군 진압 시도
- 10월 28일, 무창에 도착한 황흥은 여원홍으로부터 총지휘권 위임받고 29일 한구로 향함
- 청군의 강공에 11월 2일 한구 내줌
- 27일에는 한양도 포기하고 무창으로 퇴각
- 이때, 강소와 절강성의 혁명 연합군이 남경을 점령하고 남방의 14개 성이 혁명에 가담하 면서 위험에서 벗어나게 됨
④ 남방 혁명 세력의 양상
- 호북에 뒤이어 혁명에 가담한 남방 각 성의 혁명 양상은 조금씩 달랐음
- 대체로, 입헌파가 권력의 중추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았음
- 호북, 섬서에서는 신군 사병이 봉기했으나 봉기 후 유력한 지도자가 없어 권력이 입헌파 및 구세력에게 넘어감
- 호남, 귀주에서는 혁명파 지도하에 대중봉기가 일어났으나 입헌파, 구세력이 반격해 권력 을 탈취
- 강소의 경우, 대중적 봉기를 앞두고 입헌파가 청조관리에게 강요해 독립을 선포하고 권력 을 장악하는 일도 있었다. 신군이 거사해 권력을 장악한 운남과 같은 경우는 소수였음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