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월당 김시습과 금오신화 - 한국고전소설론
- 최초 등록일
- 2017.07.20
- 최종 저작일
- 20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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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김시습의 생애
3. 김시습의 작품 『금오신화』
3.1. 만복사저포기
3.2. 이생규장전
3.3. 취유부벽정기
3.4. 남염부주지
3.5. 용궁부연록
4. 김시습의 사상과 문학관
5.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서론
현대 엔터테인먼트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이며 문학에서는 이것을 빼고는 논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소설이다. 지금에 이르러서 없어서는 안 될 소설의 시초라면 그 가치는 시시비비를 가릴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현재 밝혀진 바로는 『금오신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로 통하고 있다. 우리나라 교육과정을 배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현재의 소설을 있게 한 원천이라면 그것만으로 큰 의의가 있는 『금오신화』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작품이다.
지금에 들어도 입을 벌리게 만드는 그의 어릴 적 천재성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그 비범함이 현존하는 영웅소설의 주인공이 아닌지 착각할 정도이다. 이러한 김시습에 대하여 생애를 중심으로 알아보고 그의 작품 『금오신화』에 대해서도 살펴보도록 하겠다.
2. 김시습의 생애
김시습은 1435년(세종 17년) 성균관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생후 8개월 만에 글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집안 어른 중의 한 사람인 최치운이 이를 기이하게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2세 때에는 시의 뜻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고 3세 때는 능히 시를 지을 수 있었다. 5세가 되자 이웃에 사는 수찬 이계전으로부터 『대학』, 『중용』을 배워 읽고 뜻을 통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러한 김시습의 천재성은 신동이라 부르기에 충분했고 이르러 궁에까지 소문이 퍼져 당시 임금인 세종의 귀에도 김시습의 이야기가 전해졌다. 그것을 확인해보기 위해 세종은 김시습을 궁으로 불렀다. 이 일화가 바로 김시습의 유아기에서 빠질 수 없는 가장 큰 사건일 것이다.
매월당집 부록 2권 본전(本傳)에 기록되어 있는 궁으로 불려간 김시습과 지신사 박이창과의 만남이 매우 인상 깊다.
“아가야, 네 이름을 가지고 능히 글을 지을 수 있겠느냐?”
그러자 곧 아이의 응대(應待)가 있었다.
“올 때 포대기에 싸여 온 김시습일세(來時襁褓金時習).”
그러자 다시 박이창의 물음이 있었다. 벽에 걸려 있는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며 하는 말.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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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김시습 [金時習]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