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두서와 조영석의 풍속화 비교 - 시대적 배경, 작가 생애, 작품 성향
- 최초 등록일
- 2017.05.21
- 최종 저작일
- 201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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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혼란기를 맞이하였으나 점차 안정되면서 숙종 때 이르러서는 국력이 증대되어 건축, 공예를 비롯한 여러 예술 분야가 고루 발전했다. 특히 영, 정조 시대를 조선 후기의 문예부흥기라 부른다.
전쟁을 겪으면서 성리학의 관념적 이념만으로는 국가를 운영하기에 충분치 않다는 각성 속에 실학사상이 태동되었다. 미술에서도 새로운 양식과 장르가 계발되고 그것이 계승, 발전되었다.
조선 후기의 회화사에서는 속화가 등장하고 진경산수가 발생, 문인화풍이 유행하였다. 그 시기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자 하는 리얼리즘, 사실주의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다. 속화는 현실 속에서 소재를 찾아 그린 것이고, 진경산수는 관념산수가 아니라 실경에 즉해서 그 아름다움과 감동을 담아낸 것이고, 문인화풍이란 단순히 그 형식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가 자신의 감정을 적극적으로 표출한다는 점에서 사실정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속화는 공재 윤두서가 시작하고 관아재 조영석이 그 형식적 틀을 완성하였다.
숙종, 영조시대의 문인화가들은 대개 현실의 관료 사회에서 소외된 양반이었기 때문에 회화에 좀 더 깊이 전념할 수 있었다.
윤두서는 해남으로 낙향한 양반이었고, 조영석은 과거 본과에 오르지 못하여 지방을 전전하였다. 간혹 보수적인 지배층으로부터 잡기말예론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지만 이들은 어느 시기보다도 그림에 열중하며 자신의 회화적 기량을 과시하였다.
윤두서는 조선후기 회화사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해남윤씨 명문가 출신으로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고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할아버지이다.
서울에 살면서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당쟁이 심해지면서 남인에게는 출셋길이 열리지 않자 벼슬을 포기하고 학문과 예술에 전념하며 지냈다.
경제, 병법, 천문, 지리 등 여러 방면에 능통하여 훗날 성호 이익은 공재가 죽자 어디 가서 물어볼 곳이 없다고 하면서 그의 연구에는 항상 ‘실득’이 있었다고 했다.
윤두서는 어렸을 적에 중국 화본을 보며 그림을 연습했고, 마구간에서 말을 보며 스케치하거나 동자를 세워놓고 데생을 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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