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 여순사건
- 최초 등록일
- 2017.05.16
- 최종 저작일
- 20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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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여순사건이란?
2. 배경
1) 여수 14연대의 창설과 구성
2) 군과 경찰과의 갈등
3) 남로당의 침투와 숙군 작업
3. 여순사건의 발생 주요사건
4. 전개상항
5. 피해상황
6. 결과
본문내용
1. 여순사건이란?
여순사건은 육군본부가 여수 제14연대에 ‘제주 4·3 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로 출동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자 1948년 10월 19일 이에 반대하는 소속 군인 2천여 명이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다. 14연대 하사관들이 주도한 이 사건은 여수와 순천을 차례로 점령했고 곧이어 전남 동부지역(벌교・보성・고흥・광양・구례・곡성)으로 번져나갔다.
사건에 대한 원인으로는 동족상잔과 반란이라는 양 갈래에서 선택해야 했던 14연대 군인들의 고민, 단선 단정을 반대했던 전국적인 사회의식, 광복 후에도 지속된 친일 경찰의 억압과 수탈 등을 그 원인으로 본다. 순천은 23일, 여수는 27일에 군경 합동 토벌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이후 진압되지 않은 14연대 봉기군과 남조선노동당 등의 지방좌익 세력 등은 지리산에 입산하여 저항을 시작했고 이것이 이른바 빨치산 투쟁이다.
여순탈환작전이 빠른 시간 안에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는 미군의 적극적 개입이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은 광주에 토벌 사령부를 설치하고 군사 장비를 지원하였고, 군사고문단원으로 하여금 작전과 정보 분야에서 국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국회는 소장파 국회의원들의 우려와 반대에도, 사건 뒤 한 달 보름 만에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 군-경 공권력의 사회적 영향력은 강화되었다.
여순사건 진압 후 이승만 정권은 반공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주민통제체제를 만들었다. 1949년에는 유숙계 제도를 실시했고, 좌익들을 선도하고 회개시킨다는 명목으로 보도연맹 을 조직했다. 이승만 정권은 철저한 반공국가를 추구했고, ‘빨갱이’라는 이념 없는 단어를 만들었다. 혹자는 이념 없이 배제원리만 가득한 반공시스템이 ‘학살의 기초를 마련했다.’라고 보기도 한다.
사건 당시 학살은 봉기군과 진압군 양측 모두에 의해 자행되었다. 토벌군의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수많은 민간인이 학살되었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 사건을 반공국가형성의 계기로 삼았다. 이후 한국전쟁으로 이어지면서 남한은 철저한 반공국가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