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이방원에 관한 고찰 리포트
- 최초 등록일
- 2017.04.27
- 최종 저작일
- 20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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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태종 이방원에 관한 고찰 리포트 입니다
목차
1. 이방원
2. 태종의 업적
3. 일반적 해석
4. 평가
5. 새로운 해석
6. 재평가
본문내용
1. 이방원
이성계의 다섯 번째 아들로 태어난 이방원은 무장 가문이었던 이성계 가문의 유일한 문과 급제자로 어려서부터 부친의 희망이었다. 정몽주 등은 이성계의 낙마 사건을 계기로 이성계 세력을 축출하고 그간의 개혁 법령을 폐지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이에 이방원은 정몽주를 처치하는 거사가 성공한 뒤 남은 정도전, 조준 등 52인과 이성계의 추대를 협의하고 공민왕 씨, 안 씨를 움직여 수창궁에서 즉위하게 하였다. 새로운 왕조의 시작으로 이방원은 중요한 고비마다 그 중심에 있게 되었다. 태종 이방원은 새 왕조를 새로 세운 뒤 아마도 부왕의 등극에 절대적인 공헌을 하였고 개인적인 능력이나 중망으로 보아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에게 좌절의 아픔을 주었다. 그 첫 좌절이 태조 초에 이루어진 개국공신의 선정과정에서 누락된 것이다. 개국공신의 선정을 주도한 태조가 공은 인정하되 친자이기 때문에 공신 선정에서 제외시켰다. 왕자 신분이 되면서 정치적,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특권을 가졌을 것이지만 개국공신의 선정에서 제외된 것은 그것을 갖는 상징적인 의미를 두고 볼 때 이방원에게는 서운한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즉위한 뒤 자신을 비롯해 방의, 방간 두 형을 개국 1등 공신에 추가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태종 이방원은 제1차 왕자의 난으로 권력을 가지게 되었는데 이는 자칫 오해를 불러올 수도 있었다. 정도전 등의 제거가 권력욕으로만 비추어진다면 여론이 좋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방원은 일단 당시 생존하고 있던 형들 가운데 맏형인 연안대군 방과에게 왕위를 양보하니 그가 조선 제 2대왕인 정종이다. 영안대군에게는 많은 아들이 있었음에도 적장자가 없었던 점이 이방원에게 후일 자신의 입지를 다지는데 유리한 요소였다. 정종 즉위 후 방원은 세자로 책봉되었고 정종이 재위 2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이방원이 차지하게 되니 그가 바로 태종이다.
참고 자료
https://namu.wiki/w/%ED%83%9C%EC%A2%85(%EC%A1%B0%EC%84%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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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ko.wikipedia.org/wiki/%EC%A1%B0%EC%84%A0_%ED%83%9C%EC%A2%85#.ED.8F.89.EA.B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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