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와 삼국유사
- 최초 등록일
- 2016.12.16
- 최종 저작일
- 201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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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김부식과 삼국사기
1. 김부식의 생애
2. 삼국사기의 구성
3. 삼국사기에 대한 견해
Ⅲ. 일연과 삼국유사
1. 일연의 생애
2. 삼국유사의 찬자와 찬술시기
3. 삼국유사의 구성
4. 삼국유사의 사료적 의의와 한계
Ⅳ. 맺음말
참고자료
본문내용
Ⅰ. 머리말
문학가 이병주는 “승자의 기록은 태양의 조명을 받아 역사로 남고, 패자의 기록은 달빛에 바래져 신화가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문장을 관찬사서로서 유교사관을 가진 『삼국사기』와 사찬사서로서 신이사관을 가진 『삼국유사』에 대해 비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즉 비추어 볼 때,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태양의 조명을 받은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면,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달빛에 바래진 신화’를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현존하는 한국역사서의 쌍벽을 이루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구성과 가치, 그리고 각 사서에 관한 여러 견해 등을 알아보고자한다.
Ⅱ. 김부식과 삼국사기
1. 김부식의 생애 (1075 ~ 1151)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金富軾)의 자(子)는 입지(立之)이며, 호는 뇌천(雷川)이다. 신라 왕실의 후예로 경주(慶州)의 주장인 김위영의 증손자이다. 이전까지 경주 일대에 세거하던 그의 집안은, 부친 김근 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과거에 합격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게 된다. 김근은 장년의 나이에 죽음으로써 고위 관직에까지는 오르지 못하였다. 그의 집안이 신라 왕실의 후예이기는 했지만, 고려 왕조에서는 현실적으로 귀족가문이 아니었기 때문에 김부식과 그의 형제들은 열심히 공부하여 학문을 통해 출세해야만 했다.
김부식은 숙종 원년(1096) 만 21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중앙관료로 진출하였다. 허나 과거급제 후 바로 관직에 진출하지는 못하고 몇 년 동안 서임을 기다리다 정7품직인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의 기록관인 사록참군사(司錄參軍事)에 초임되었고, 그 임기를 마칠 무렵에는 한림원의 직한림(直翰林)에 발탁되었다. 이후 그는 때때로 다른 직에 드나들기도 하였지만, 20여년 간 한림원에 근무함으로써 자신의 학문을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다. 특히 예종대의 학문 우대 정책으로 보문각, 청연각이 설치되었는데, 그의 학문적 성장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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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진, 『삼국유사의 사학사적 연구』, 일조각, 2014
김부식, 『삼국사기 3 (나랏말싸미 5)』, 솔출판사, 1997
高炳翊,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歷史敍述」, 1969
金哲埈, 「高麗中期의 文化意識과 史學의 性格, 三國史記의 性格에 대한 再認識」, 1973
金相鉉, 「三國遺事論」, 2003
정구복, 「김부식의 생애와 업적」,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