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에 대한 평가 : 폭군인가 성군인가?
- 최초 등록일
- 2016.06.08
- 최종 저작일
-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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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머리말
Ⅱ. 두 차례의 사화(士禍)
1. 무오사화(戊午士禍)
2. 갑자사화(甲子士禍)
Ⅲ. 사화를 통해 얻은 왕권의 행사
1. 사치・사냥・연회・음행
2. 왕권의 자의적(恣意的) 행사
Ⅳ. 결론
Ⅴ.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조선은 성리학(性理學)의 국가이다. 일반 민(民)들의 삶부터 국가를 지배하는 통치 이념까지 성리학이 깃들어있지 않은 것이 없다. 자연히 역사적 기록이나 평가 또한 성리학적 이념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 보고서에서는 조선 뿐 아니라 한반도 전 역사를 통틀어 희대의 폭군으로 평가받는 연산군(燕山君)에 대해 성리학적 관점에서 평가한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객관적 입장을 견지하여 평가해보고자 한다.
연산군이 폭군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언론(言論)을 폐하고, 간(諫)하는 신하들을 탄압했으며, 음행과 방탕을 일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가는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왕도정치(王道政治)를 구현하고, 경연(經筵)에 충실하며, 신권이 왕권을 견제하는 것이 이상적인 정치라는 성리학적 이념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보고서에서 논하고자 하는 성군이란, 결과적으로 위민(爲民)하는 목적으로 정치한 왕이다. 기록을 남긴 소수의 위정자에 의한 성군이 아닌, 국가를 받치고 있는 다수의 민에 있어서의 성군이 진정한 성군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연산군을 평가했을 때, 연산군을 과연 폭군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이 보고서의 결론이 될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기존의 관점에서 연산군이 폭군인 이유에 대해 간단히 짚어볼 것이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된 기준에서 연산군을 재평가하는 과정을 거쳐 연산군은 어떤 왕이었는가에 대한 결론을 내고자 한다. 특히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의 기록을 토대로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기록의 신빙성에 대한 다양한 논의 또한 포함하여 사료의 신빙성에 대한 개인적 견해를 덧붙이고자 한다. 연산군을 재평가하는 과정에서는 연산군의 정치가 민들의 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를 중심으로 지배자에 의해 기록된 기존의 역사적 평가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Ⅱ. 두 차례의 사화(士禍)
1. 무오사화(戊午士禍)
연산군 대에는 두 차례의 사화가 발생했는데, 그 첫째인 무오사화(戊午士禍)는 연산군 4년 7월 1일에 시작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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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원림, 『연산군 : 그 허상과 실상』, 일지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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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무오사화』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374&cid=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