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청나라 멸망의 원인을 정치.경제.사회.군사 등 다양한 측면에서 분석하여 작성
각주와 출처가 성실하게 기재.
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황제 중앙 집권체제의 모순
2.지도층의 부패 및 재정의 고갈
3.팔기군의 쇠퇴
4. 인구의 이동
5. 지주와 전호의 관계 변화
6. 민중의 반란
Ⅲ. 결론
본문내용
한 국가의 멸망원인은 하나가 아니다. 여러 가지 일들이 얽히고 설켜서 몇 백년간 존속하던 국가가 하루아침에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 나라의 붕괴 원인을 다각도로 알아봄으로써 그 나라가 존속하는 동안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모습을 정리하고 왕조 변화의 과정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하나의 끝은 또 다른 하나의 시작인 법. 그것을 통해서 다음 역사의 전개에 필연성을 부여하며 하나의 연결된 고리를 이루어지게 한다.
<중 략>
임시적인 군사기지로 출발하였던 팔기제도(八旗制度)는 18세기 중엽에 이르러 상설화 되었고 팔기인의 수가 점차로 증가하면서 여러 의무를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다. 팔기의 조직․행정․재정상의 문제점과 국내외의 상황이 팔기군의 쇠퇴를 가속화 시켰다.
청조가 중국을 지배하던 268년동안 팔기군의 수는 두배로 증가 하였다. 그러나 현역병인 마갑(馬甲)의 정원이 동결되었기 때문에 복무하지 않는 한산기인(閑散旗人)의 숫자가 증가하였다. 18세기 말 물가급등으로 기병(旗兵) 자신이 부담하던 무기비․장례비․혼례비․여행비와 한산기인에게 지급하던 진휼비를 팔기주방 자체에서 부담해야만 하였다.
<중 략>
Ⅲ. 결론
청조 말기 인구는 늘었으나 그들을 지도할 행정 역량의 성장이 동반되지 않았고, 평화와 질서를 유지해야할 군사의 힘도 커지지 못했다. 오히려 조정은 황제 독재 체제의 모순과 무사안일주의에 빠져 그 모든 행정의 효용들을 상실해만 가고 있었고 심지어는 사치와 무리한 군사비 지출, 관개사업으로 재정의 파탄까지 몰고 왔다. 인구는 토지에서 생산되는 식량보다 더 많아졌고, 지주와 상인들의 농민 수탈 또한 극심해지면서 농민들은 살 곳을 찾아 이리저리 떠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유민들은 반정부적인 의식을 갖게 되면서 각종 반란 조직에 참여하여 반란 세력이 되었고, 농촌에 남아있는 농민들조차 항조․항량의 형태로 그들의 불만을 표출하였다. 그 밖에 광동(廣東)연안에 나타나기 시작한 해구(海寇)등 청말의 중국 대륙은 심한 혼란을 겪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정치는 아직 전근대적인 틀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점차 효율성까지 떨어지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급격한 사회 변화를 받아들이는 데에 실패했던 것이다. 마침 서구 열강의 침입으로 청조는 대외적인 정책의 혼란마저 겪으면서 중국 제국의 마지막 문을 닫게 되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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