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와 민족해방을 위한 노력
- 최초 등록일
- 2015.09.10
- 최종 저작일
-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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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근현대사 과목을 들으면서 우리나라역사를 얘기할 때 일본을 빼놓을 수 없다고 많이들 얘기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서양과 교역하며 강대국이 되고 또 그로인해 대한민국을 침략하던 상황, 그리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대한민국 독립운동가들의 노력들을 이 레포트에 담았습니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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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1910년부터 시작된 일제강점기는 35년 동안이나 지속되었다. 일제 강점기가 열린 원인을 찾아 일본의 근대화부터 거꾸로 가면 일본이 1860년대 개혁을 이뤄냈던 메이지 유신이 있다. 유신은 운동화 끈을 새로 묶는다는 뜻으로, 새로운 근대화를 통해 서양을 배우고 일본을 발전시키자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유신을 통해 안으로 천황 중심의 국가를 일으키고, 외부적으로는 서양의 압박을 극복하고자 하였다. 그 당시에 강대국들은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많은 힘을 쓰고 있었는데 일본이 이에 자극 받아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그 첫 걸음으로 운요호 사건 (1875)를 계기로 외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인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면 1860년대 이후 일본에서는 조선에 대한 침략 야욕이 잠재되어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일본은 단계적 침략 전략을 가지고 조선에 접근한 것부터 시작된다. 당시 국제사회는 제국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대로, 강대국이 무력을 앞세워 후진국을 압박하여 개항을 유도하거나 침략하는 사례가 많았다. 일본은 1854년 미국의 포함외교를 앞세운 무력시위로 상대국을 압박하여 목적을 달성하는 강제적 외교 수단에 바로 굴복하고 개항하였다. 그 후 1868년 메이지유신으로 근대화 개혁을 단행한 후, 일본은 조선과의 교섭을 시도하였으나 흥선대원군의 양이정책으로 실패하였다. 그러나 1873년 흥선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면서 개국의 분위기가 일어났다. 한편, 일본은 조선과의 수교를 좀 더 신속하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포함외교를 시도하게 되었다. 그 첫 번째 사건이 운요호 사건이다.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부산에 침투시켰다. 이에 부산훈도 현석운이 부산의 왜관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운요호 함장은 ‘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현석운를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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