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의 징비록 서평
- 최초 등록일
- 2015.07.01
- 최종 저작일
- 20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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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아픈 기억일수록 항상 기억해야 한다.
2. 미려오는 전쟁의 검은 구름
3. 임진년,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되다.
4. 피란, 또 피란
5. 계속되는 패전, 빼앗긴 평양성
6. 여러 의병과 장수들의 활약
7. 행주대첩과 명나라의 강화 노력
8. 진주성과 남원성의 함락과 백성들의 고통
9. 이순신과 수군의 승리
본문내용
류성룡은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 전인 1542년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에서 태어났다. 류성룡의 집안은 명문가로 손꼽히는 안동의 풍산 류씨 집안이라 가문의 이력이 정말 대단했다. 류성룡은 어릴 때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랐다. 4살 때부터 글을 읽기 시작했는데 6살 때는 대학, 맹자를 읽고 8살 때는 이미 공자, 맹자의 이치를 다 깨달았을 정도였다고 한다.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란 만큼 총명하고 공부하기를 무척 좋아했는데 책 한 권을 읽어도 어려운 것이 나오면 반드시 혼자서 몇 번이고 책을 읽고 또 읽으며 자신이 생각을 정리하고 나서야 해설 책과 자신의 생각을 맞춰 보았다고 했다. 류성룡의 침착함과 위기해결 능력은 어렸을 때부터 탁월했다. 류성룡은 16세인 1557년에 과거에 급제했고 1562년에는 퇴계 이황의 문하로 들어가 안동의 도산 서원에서 공부하게 되었다. 이황은 류성룡이 학문하는 자세가 매우 바르고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의문이 풀릴 때9까지 물어보며 배운 것을 통해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며 실천하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고 ‘과연 하늘이 내린 인물이로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1564년 생원시 급제를 시작으로 이듬해에 성균관에 입학하고 1566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에 첫 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는 30년 동안 관직에 있었고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간 후 조정에서 다시 불러도 응하지 않았다. 언제나 고향집을 그리워했고 어머니에 대한 효심에 벼슬도 마다하는 효자였다. 1590년에 우의정을 시작으로 좌의정 영의정을 거쳐 삼정승이라 하는 관직을 모두 거쳤고 이후 약 10년 동안 정승의 자리에 있게 된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1592년 4월에 일어났다. 그는 회교 전문가였다. 그래서 조선, 일본, 명의 큰 정쟁에서도 막힘없이 관련된 일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문서를 만드는데 정말 탁월한 능력을 갖추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탁월한 안목이 있었다. 이순신이 바로 그 기대에 충분히 보답한 사람이다. 왜란이 끝나고 조정에서 공과 죄를 논하는 자리에서 류성룡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명나라에 가지 않는다는 죄로 탄핵을 받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