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토론
- 최초 등록일
- 2015.05.28
- 최종 저작일
- 20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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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서론
2. 인물·배경 소개
1) 인물 소개
3. 쇄국이냐 개화냐
1) 흥선대원군 – 병약한 조선에 아직 쇄국은 이르다
2) 명성황후 – 시대적 흐름에 문호 개방이 맞아
4. 누구의 개혁이 더 합리적이었는가
1) 흥선대원군 – 뿌리 깊은 세도가문의 그늘을 거둬내는게 우선
2) 명성황후 – 대원군의 개혁은 전근대적인 조치 문제 많아
5.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발버둥인가
1) 흥선대원군 – 권력을 위한 끊임없는 투쟁
2) 명성황후 – 외척세력과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
6. 결론
7. 참고문헌
본문내용
구한말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으나 뜻을 달리한 두 정치인이 있다. 한 사람은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고, 다른 한 사람은 그의 며느리 명성황후이다. 두 사람 모두 살아생전 굴곡 없는 평탄한 인생을 살지 못했다. 대원군이 민치록(閔致祿)의 딸 민자영을 왕비로 간택할 때 훗날 그녀가 자신을 없애려 들것임을 몰랐던 것을 보면 인간사가 얼마나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것인지 허무함마저 느껴진다. 조국에 폭풍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서로에게 칼을 겨눌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의 일대기는 우리 사이에 드라마나 영화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대립된 입장을 보인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이지만 ‘배경’이 없어서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점이나 혼란 속에 열강에게 이리저리 휘둘리는 등 유사한 점이 많다.불과 1세기 전의 일이지만 두 사람에 대한 현대의 해석은 여러 갈래로 엇갈린다. 흥선대원군은 기득권층의 부패로 망해가던 조선을 개혁하고 외세의 침탈로부터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평가되기도 하는 반면 일부 학자들은 무리한 개혁정책으로 조선의 파멸을 오히려 앞당겼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또 명성황후는 드라마나 뮤지컬 등에서 여러 열강의 세력을 이용해 정국을 운영한 뛰어난 외교가이자 여걸로 묘사되기도 하는 반면에 외세를 끌어들여 나라를 파멸의 길로 인도한 악녀로 평가되기도 한다.본 발표문에서는 개항기의 열강의 각축장 속에서 나라를 운영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두 인물의 대립과 더 나아가 두 인물로 대표되는 쇄국과 개화 두 진영의 대립을 다양한 시각에서 토론하고자 한다.
<중 략>
1820(순조 20)∼1898. 조선 말기의 왕족·정치가.자는 시백(時伯), 호는 석파(石坡). 서울 출신.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이며, 조선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이다. 세간에서는 대원위대감(大院位大監)이라 불렸다. 남달리 정권에 집착해 명성황후와 대립했던 생애 후반에는 정치노선이 변화무상했으나 고종 초 10년간의 집정은 강직한 성격과 과감한 개혁정치로 내치에 실적을 올렸다. 또 서구세력의 침략적 접근에서 민족을 수호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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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식백과] 가로막힌 역사 발전 : 세도 정치의 폐단 (고교생이 알아야 할 한국사 스페셜, 2009.2.5, (주)신원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