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BC급 전범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15.04.23
- 최종 저작일
- 20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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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서론
Ⅱ.본론
1.그들은 왜 포로 감시원이 되었는가?
2. 포로수용소에서의 업무 및 실태
1)태면 철도 건설현장
2)말레이 포로수용소- 팔렘방 석유공급기지
3)인도네시아 자바 포로수용소
3. 전쟁 후 BC급 전범 재판
1)B,C급 전범의 사례
(1)문태진씨 사례
(2)윤동현씨 사례
(3)홍종묵씨 사례
4. 왜 포로감시원의 전범비율이 높은가?
5.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6. 석방 후 해결문제와 동진회
7. 최근 상황
8. BC급 전범 사건일지 요약
Ⅲ.결론
Ⅳ.참고문헌
본문내용
태평양 전쟁이 끝난 지 벌써 68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전쟁이 끝난 후 전쟁에서 피해를 입은 국가들의 패해 보상이 이루어 졌으며, 우리나라에서는 수 년 전부터 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가 화제가 되어, 세상에 알려졌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역사의 진실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에 맞서 묵묵히 힘겨운 싸움을 벌여 온 군위안부 할머니들은 역사의 굴레에 짓눌려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화제가 되어 우리나라 국민들이 관심을 가지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진실을 외면하는 일본 정부에 맞선 투쟁은 군위안부 문제만이 아니었다. 태평양 전쟁 중 포로감시원으로 전쟁을 보냈던 조선인 전범 또한 그에 맞서 대항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의 감시원으로 모집된 조선인 청년은 3000여명, 그 중에 129명이 전범이 되었고, A급 전범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일본인은 7명이었던 것에 비해, 조선인 23명이 B․C급 전범으로 교수형이나 총살형에 처해졌다. 전쟁의 주범인 일본인에 비해 왜 포로감시원에 불과 했던 조선인의 교수형, 총살형이 더 많았을까?
군위안부 등 전쟁피해 사실 중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재판소에서 일본인으로 취급 받으며 전쟁의 책임을 감당하였던 조선인 BC급 전범 문제에 대해 이들은 왜 BC급 전범이 되었으며, 그들이 입은 피해와 출소 후의 노력에 대해 본 발제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Ⅱ 본론
1. 그들은 왜 포로감시원이 되었는가?
앞서 서론에서도 설명 했듯이 태평양 전쟁 당시 포로감시원으로 근무 하였던 조선인은 3,000여명이었다. 이들은 1942년 5월 22일 날짜의 경성일보에서 미국, 영국인 포로감시에 반도청년을 수천 명을 채용한다는 신문광고를 보고 조선인 감시원이 된다. 당시 포로감시원의 조건은 초봉 50원, 기간은 2년에 불과 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을 모집 할 수 있었다.
참고 자료
우쯔미 아이코, [조선인 BC급 전범 해방되지 못한 영혼], 이호경 옮김, 동아시아, 2007년
조선인 전범들 또 다른 희생양, <MK뉴스> , 2007.08.10 15:31:41,
http://news.mk.co.kr/newsRead.php?year=2007&no=424491
김용희 [B·C급 전범재판과 조선인]. 경성대. 2007
이현주 [특집 해방 후 BC급 戰犯이 된 한국인 포로감시원] 한국근현대사연수. 2004
로스티뉴 [한국인 군속의 인도네시아에서의 독립운동] 인하대, 2009
정용욱 [일본인의 전후와 제일조선인관] ,미상, 2006
이호경, [KBS스페셜-815기획 "해방되지 못한 영혼-조선인 BC급 전범"], KBS, 2006/08/12